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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 - 이어령의 첫 번째 영성문학 강의
이어령 지음 / 포이에마 / 2014년 10월
평점 :
신학의 언어를 통해서는 경험할 수 없는 영성의 세계!
이 책은 신학의 언어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영성 세계를, 문학의 언어가 더듬어 찾은 작은 틈새로 살짝 엿보는 책입니다. 그것은 "음악의 한 토막, 함성의 짧은 폭발음, 그리고 찰나의 냄새와 같은 지극히 순간적인 체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작은 틈새로 쏟아져 나오는 "영원한 빛과 생명"에 압도되어 본 사람은 문학이 가진 힘이 무엇인지, 왜 우리가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를 이미 알고 있는 독자일 것입니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과학이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합니다. "모순의 세계를 논리로 설명할 수 없고 법칙으로도 해명할 수 없기 때문에 소설과 시가 있는 것"(62)이라는 이야기지요. 신앙의 세계, 영성의 세계는 인간 이성으로 다 이해되어지고, 논리로 다 설명되어질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과 같이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세계에서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고 기도의 세계에서 영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데는 문학적 상상력이나 시인이나 예술가의 마음이 필요"(12)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소설이 우리를 매혹시키는 까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세상살이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그 삶의 민낯을 볼 수 있습니다"(6). 거창하고 큰 이야기가 아니라, 지극히 작은 이야기, 한 집안, 한 도시, 한 가족, 한 소년의 이야기 속에서 잃어버렸던 영성의 세계와 만날 수 있는 것이 문학의 매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의 언어에는 거부감을 가진 독자라도, 소설을 읽은 뒤에 설명 불가능한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의심할 수 없는 신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다섯 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영성의 세계, 신앙의 세계, 신의 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문학작품 자체는 하나님도 영성도 아니지만, 이것을 통해 볼 수는 있습니다"(10).
총 다섯 편의 문학 강좌를 통해 삶과 죽음의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는 이 책은 혼자 읽었을 때는 미치 깨닫지 못했던 깊은 통찰을 제공하기도 하고, 잘못 해석되고 있는 부분을 지적해주기도 하고,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던져야 할 진정한 물음은 무엇인지 가르쳐주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는 내내 쉴 새 없이 밑줄을 그어댔습니다. 다섯 편의 소설별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 / 죄인들을 위한 잔치
아무리 나쁜 사람들도 파 뿌리 하나는 있습니다. 이 파 뿌리의 잔치가 열립니다. 우리는 성스러운 성찬식이 아니라 가난한 동네 가나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고, 초대받은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넉넉한 포도주를 주십시다. 서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의 기쁨의 잔치는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결론입니다. 부디 오늘 우리들도 파 뿌리 하나씩 가지고, 끝나지 않은 가나 혼례식에서 주님이 내리시는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77).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 / 도시인의 내면 풍경과 생명 찾기
그러니까 오늘 <말테의 수기>를 읽는 것은, 그저 문학작품을 읽으라는 게 아니라, 우리 일상 속에서 굳은 살이 박여 아무리 만져도 느껴지지 않는 그 생명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손을 통해서 긁어보자는 것이지요. 릴케의 손톱으로 피가 나도록 긁어보자는 거예요. 그러면 그 굳은살 속에 말랑말랑하고 아주 여린 여러분들의 생명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108).
앙드레 지드의 <탕자, 돌아오다> / 집을 떠난 사람만이 돌아올 수 있다
아무리 하나님이 붙잡고 행복을 주셔도 인간이란 "이런 행복 다 버리고라도 내 인생을 찾을겁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이 아무리 행복해도, 나는 그렇게는 못 살겠습니다. 내가 내 발로 걸어 나가 당신의 동산이 아닌 나의 세계를 만들겠습니다. 내가 택한 것이 비극이고 비운이라 할지라도 이 행복 버리고, 나는 가겠습니다" 하는 존재입니다. 이게 휴머니즘이거든요(190).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 혁명이냐 사랑이냐
증오심으로 뭉친 한 사내가 미리엘 주교가 보여준 사랑에 감화되어 변화하는 이야기입니다. 미리엘 주교의 사랑이 없었던들 감옥에서 백번 나왔다고 해서 자유인이 될 수 없지요. 장발장을 자유인으로 만들고 쇠사슬에서 벗어나게 한 것은 은촛대의, 영혼을 밝혀주는 빛이었습니다. 이렇게 <레미제라블>은 정말로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길, 로베스피에르 식의 살육과 숙청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것이지요(277).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 / 생명이란 이토록 기막힌 것
먹고 먹히는 가열한 생존조건 속, 한시도 두려움과 경계를 늦출 수 없는 긴장 속에서 파이는 오히려 서로를 살리고 격려하고 끝내는 사랑과 믿음으로 교감하는 영성을 발견합니다. 모든 생명체가 살고 있는 지구가 작은 구명정으로 축소되고, 그 생명이 한 명의 소년과 한 마리 호랑이라는 결정체로 발견될 때, 우리는 비로소 불신하고 버렸던 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335).
이어령 선생님은 "우리 일상 속에서 굳은 살이 박여 아무리 만져도 느껴지지 않는 그 생명을, 소설가의 손톱으로 피가 나도록 긁어보자"고 합니다. 이 책은 문학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닙니다. 황량한 영혼, 죄 많고 썩어 냄새가 나는 인간 세상,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존재의 불안과 공포의 민낯, 무도덕의 무의미 등을 문학이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고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가를 추적합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깊이 와닿았던 부분은 과학과 합리주의가 신을 살해한 후, 오히려 인간은 기계적으로 전락하고 생명이 너무나 하찮게 다루어지면서 죽음마저 너무나 하찮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왜소해지고 가벼워진 우리들의 내면의 황량함,
한마디로 존재 자체가 너무나 빈약해졌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문학이 고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생명의 전율을 느끼고 죽음의 냄새를 맡을 줄도 아는 데라야"(129) 한다는 말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생에 대한 지독한 목마름이 없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성의 세계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생명을 그냥 소비하며 살기에도 바쁘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는 도구가 아니라 영혼의 갈증을 일으키는 도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생을 정말 사랑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영생을 구할 수 있습니까? 생이 지겹고 죄스러운 사람이 또 무슨 생을 살아요? 생이 빛나고 아름답고,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 지극히 아름답기 때문에 더 살고 싶고 영생을 얻고 싶은 것이지, 요즘처럼 살래도 살기 싫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삶을 부활해서 또 살아요? 그러니까 교회에서든 어디서든 생이 얼마나 멋지고 빛나는 것인지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데 미치도록 해야 합니다"(199).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작품에서 나는 영혼의 악취, 죄인의 악취, 부조의 악취, 죽음의 악취를 맡았는데, 너무나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생의 환희, 은촛대의 은총, 삶의 불꽃을 더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지독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과 바람, 공기를 갈망하게 되듯 말입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불꽃이 있어야 하고,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 그것을 영성이라 이름붙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영성의 불꽃은 신학의 언어만으로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설교가들이 긴장해야 할 듯합니다. 문학이 이처럼 위대한 설교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