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 27분 책 읽어주는 남자
장-폴 디디에로랑 지음, 양영란 옮김 / 청미래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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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 27분 책 읽어주는 남자

 

 

"이제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햇살이 김이 서려 뿌연 열차 창에 와서 부딪히는 동안 종이에 글은 길고 긴 음절의 그물이 되어 그의 입 밖으로 나왔다. (...) 그와 같은 칸에 탄 승객들에게 그는 글을 읽어주는 남자, 주중이면 매일 크고 또렷한 음성으로 가죽 가장에서 꺼낸 몇 장의 글을 낭독하는 조금 이상하고 별난 사람이었다. 그 글들은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책들에서 떨어져나온 낱장들이었다"(13).

 

  

6시 27분, 이른 아침 전철 안에서 매일 책을 읽어주는 남자가 있습니다. 경건한 아침 의식처럼 그 남자가 출입문의 오른쪽에 달려 있는 보조의자에 자리를 잡으면 열차 안은 차츰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남자는 늘 들고 다니는 가죽 서류가방에서 종이 서류철을 꺼내 큰 소리로 낭독을 시작합니다. "요리책 낭독에 이어, 소설의 48페이지를 낭독하는가 하면, 탐정소설의 한 페이지를 읽은 다음, 돌연 역사책 한 페이지를 읽는 식"(13-14)입니다. 그가 읽는 것은 책에서 떨어져 나온 낱장들이기 때문입니다. 

 

남자의 이름은 길랭. 그는 책을 좋아하고, 어머니는 그가 출판계 임원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의 직업은 책 파쇄공입니다. "체르스토르 500"이라는 파쇄기를 작동시키는 것이 그의 일인데, 그는 이런 단어들로 그 기계를 묘사합니다. "이름에서 죽음의 냄새가 배어"오는, "거의 11톤이나 되는 괴물", "파쇄만이 유일한 기능", "전부복과 같은 색상", "추함", "맹렬하게 돌아가며", "무시무시", "뼛속 깊은 증오심." 그의 선배에 의하면, "이놈은 집단학살자!"인데 길랭은 이것이 "놈에 대한 가장 적절한 정의"(23)라고 동의합니다. 그토록 증오하는 일을 15년 넘게 하며 살아온 길랭은 "그 일이 너무나 지긋지긋해서 오장육부가 터지도록 소리를 지를 때"(142)도 있습니다.

 

직장 선배 주세페는 대량 파쇄 후 기계 안에 남겨진 낱장들을 "살아 있는 살갗"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감정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이 녀석들은 대학살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생존자들이야, 애송이"라고 말하곤 했다"(52-53). 길랭이 매일 아침 6시 27분, 전철 안에서 낭독하는 낱장들은 바로 이 대학살에서 살아 남은 "살갗"들입니다. 이 아침 의식이 그의 삶에 유일한 위안입니다.

 

 

 

 

 

"길랭 비뇰의 삶에 그 기기가 끼어들게 된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었다"(118).

 

 

어느 날, 그의 삶에 끼어든 USB 하나로 인해 무채색이었던 그의 삶에 색이 입혀지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순전히 우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총 72개의 파일이 저장되어 있는 USB. 그것은 누군가의 일기장 같기도 하고, 낙서장 같은 원고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길랭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웬 여자의 매력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혹시 누군가의 글만 보고 그 글을 쓴 이에게 사랑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있습니다. 책을 한 권 읽었을 뿐인데, 이 남자를 사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 김연수. 내가 읽은 그 한 권의 책말고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그의 얼굴도 몰랐지만, 나는 분명 사랑의 감정을 느꼈습니다. 유부남이라는 걸 알고 금방 마음을 접어야했지만요.

 

USB에 저장되어 있는 72개 파일을 단서로 "낯선 여자"를 찾아 헤매는 길랭을 보며, '이렇게도 사랑에 빠질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연히 주운 사진 속 여자에게 반해 지구 반바퀴를 여행하는 남자 이야기는 읽어봤지만, 얼굴도 모르고, 목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고,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는 여자에게 위로를 받고 동질감을 느끼는 남자는 길랭이 처음입니다.

 

길랭의 삶은 이제 그 석류빛의 USB를 줍기 전과 줍기 후로 나뉩니다. USB를 줍기 전, 그의 삶은 없는 것투성이었습니다. "없는 것투성이 하루. 욕망도 없고, 식욕도 없으며, 갈증도 없고, 심지어 아무런 기억도 없는 하루. 루제드 릴(그가 키우는 금붕어)과 그는 하루 종일 빙글빙글 맴만 돌았다"(84). USB를 손에 넣은 후, 그의 삶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희미한 색상을 생기 있게, 심각하고 근엄한 것을 덜 진지하게, 겨울을 덜 춥게, 참을 수 없는 것을 견딜 만하게, 이름다운 것을 더 아름답게, 추한 것을 덜 추하게, 요컨대 나의 삶을 좀더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사람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224). 이런 사랑 해보셨나요?

 

<6시 27분 책 읽어주는 남자>는 가을에 읽기 좋은 책입니다. 읽는 재미가 반감 될까 말을 아끼고 싶지만, 체르스토르의 뱃속으로 빨려들어가 두 다리를 잃은 주세페가 다시 생기를 되찾는 과정, 낭독 중에 19금 페이지가 튀어나와 당황한 길랭과는 달리 "몰개성적인, 기능적인, 무미건조한" 환경에 내던져진 할아버지 할머니들 사이에 조용히 생기가 퍼져가던 장면은 압권이었습니다. 가을만큼 쓸쓸한 계절도 없지만 가을만큼 사랑하기 좋은 계절도 없는 듯합니다. 책을 매개로 이어지는 우정과 사랑이 가을 햇살처럼 시린 가슴 안으로 따스하게 스며드는 <6시 27분 책 읽어주는 남자>, 올 가을 낙엽지는 풍경 속으로 풍덩 빠져 들어가 이 책이 전하는 온기에 가만히 마음을 맡겨보아도 좋을 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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