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분 후의 삶
권기태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네가 헛되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누군가의 이 말이 마음속을 맴돌았습니다. <일분 후의 삶>에 등장하는 열 두 명의 증언자들은 "1분 후에도 내가 여전히 살아 있을 수만 있다면 하고 간절히 바랐던 체험들을 가지고 있"(4)습니다. 이 책은 그 생의 극한에서 다시 '내일'을 얻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에 의해 그들의 기억이 생생하게 재구성 되는데, 그들에게 남은 것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건져진 '기억'만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옆에서 죽음에 삼켜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끔찍한 통증이, 신체의 일부를 절단해야 하는 상처가, 고통스러웠던 순간의 악몽도 같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억에, 마음에, 몸에 그 무엇보다 가장 깊이 아로새겨진 것은, "살아 있다!"는 생생한 생의 감각입니다. 너무 당연해서 자꾸만 잊게 되는, 그 감각. 살아 있다! 그들의 체험은 평범한 하루에 진저리를 치며, 삶을 저주하고, 악착을 떠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정말 소중한 것인지를, 우리가 얼마나 많은 순간 진짜 소중한 것을 잊은 채 생(生)을 낭비하고 있는지를 조용히 깨닫게 해줍니다.




 
"사실 희망은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거짓말일 때가 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차라리 부질없는 희망을 접어버리는 게 마음의 평정을 가져온다. 하지만 희망을 버리면 죽을 수밖에 없을 때 선택할 일은 오직 하나다. 그 거짓말이 현실이 되도록 사력을 다하는 것"(39).

열두 사람은 증언하기를, 극한의 위기에서 그들을 건져준 것은 바로 희망, 삶에 대한 의지였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살고 죽는 일이 의지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지금의 위기에서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자신을 속이는 거짓 희망일지라도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그 거짓 희망을 붙잡는 것뿐이라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잇는 것은 오직 하나 그 거짓말이 현실이 되도록 사력을 다하는 것이라고. 이 책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쉽게 인생을 비관하고 원망하며 포기하고 마는 우리에게 그것이 얼마나 못난 투정이고 응석인지를 직시하게 해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살아야겠다는 삶의 의지를 놓지 말 것. 이것이 생명을 가진 자가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 할 거룩한 의무라는 것을 잊지말아야겠습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까지 몸부림을 쳐야 했다. 백 번을 해도 일어나지 않는 일이 불과 한 번 만에 일어날 수도 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그 한 번을 붙잡는다"(184). 



 
"생사의 위기를 넘은 생존자들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난 게 아니라고 말한다. 집에 있는 누군가를 위해 그렇게 버텼다고 말한다. 비행기를 조종했던 작가 생텍쥐페리가 그랬다. 그는 파리에서 사이공으로 날아가다가 리비아 사막에 추락했다. 그리고 닷새를 버텨서 베두인족을 만나 살아났다. 그는 말했다. 내 실종을 알고 종일 슬퍼할 아내를 생각하며 견뎠다고"(150).

<일분 후의 삶>은 노희경 작가의 최신 화제작 <괜찮아, 사랑이야>에 등장했던 도서입니다.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며 동생에 대한 복수심만이 유일한 존재 이유였던 형(장재범)에게 건네진 책. <일분 후의 삶>은 극한의 위기에서 건져준 것이 삶의 의지였다면, 그 의지가 불타오르도록 만든 힘은 가족이었음을 증언합니다. 차가운 바닷물에 잠겨 당장 얼어 죽어가고 있는 항해사가 그 순간에도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만든 건 '어머니'의 얼굴이었으며, 술 취한 채 맨홀 아래로 떨어져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지하 미로의 완벽한 암흑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50대 가장이 쉽게 삶을 내려놓을 수 없었던 것은 치매를 앓고 있는 노모와 병든 아내, 그리고 아직은 아버지의 돌봄이 필요한 4남매 때문이었습니다. 건국 후 최초의 여성 비행사라는 타이틀을 가진 비행사가 예고 없이 찾아온 죽음이 문턱에서 후회한 것은 "남편하고 좀 더 이야기 많이 나누고 살걸", "그렇게 소중한 사람들을 왜 좀 더 아까주지 않았을까"였습니다(254).

그러다 생각했습니다. 여기 열두 증인들은 추락의 공포 속에서 가족을 생각하며 버텼는데, 가족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추락하고 난 <괜찮아, 사랑이야>의 장재열은 무슨 힘으로 버텨야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도 필요한 건 역시 다시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에는 태권도 대표 선수를 꿈꾸던 청년이 한 낯선 아이의 부탁으로 전선에 걸린 연을 내려주려 전봇대에 올랐다가 2만 2,99볼트의 전기가 그의 몸을 관통하는 바람에 오른 팔을 잘라내야 했던 사연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에겐 악몽처럼 남겨진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그날 왜 나를 찾아왔을까? 전봇대나 연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체육관에. 그리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사범실에. 게다가 그때 나 말고도 사범이 두 사람이나 있었는데. 그 아이는 왜 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나한테 말을 걸었을까? 왜? 왜 그 아이가 내게 나타났을까? 낯도 모르는 그 아이가"(135). 마침내 그 아이는 손이 필요했고, 우리는 누군가의 손이 되고 싶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의 생에는 다시 따스한 온기가 스밉니다.

 

  

"행복은 돈으로 저축해둘 수 없다. 앞날을 위해 눌러둘 필요도 없다. 나는 아기를 안고 기뻐하는 아내를 보며 생각했다. 오늘은 어제의 다음 날이 아니다. 내일의 하루 전도 아니다. 오늘 핀 장미에 대해서는 오늘 즐거워해야 한다"(235).

<어바웃 타임>이라는 영화를 보면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부자(父子)에게 마지막 작별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함께 시간 여행을 떠나는데 아버지와 아들이 다시 찾은 순간은 바닷가를 산책하던 평범한 날의 어느 한 때입니다. 이 장면에서 숨죽여 많은 눈물을 흘렸는데, 나이가 들수록 깨달아지는 한가지 진실은 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성취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낸 평범한 날들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일분 후의 삶>가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날카로운 끝으로 나른한 일상의 밀도를 높여주기 때문입니다(5).


 

 

"몇 분을 더 살아도 비관하며 살 수는 없었다. 우리 삶에 꽃이 절실하다면 성에에 그려내기라도 해야 했다"(28).

한 번 살고 죽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이치입니다. <일분 후의 삶>을 읽으며 삶에 예의를 다하고 죽는 순간 최후의 위격을 갖추어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길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하며,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는 교훈을 새겼습니다. 내 삶에 꽃이 절실하다면 그려내기라도 해야겠다는 오기도 생겼습니다.

 

 

<일분 후의 삶>은 논픽션이지만 작가는 "열두 사람이 겪은 일의 사실 관계는 그대로 밝혀두되", 문학의 거푸집 속에서 "주제, 얼개, 비유라는 세 가지 요소를 각각의 글에 맞게 부여"했다고 일러둡니다. 그리하여 이 책은 녹취록처럼 생생하고, 소설처럼 아름답습니다. 사는 것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때, 이 책을 만나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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