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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황홀 - 우리 마음을 흔든 고은 시 100편을 다시 읽다
고은 지음, 김형수 엮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8월
평점 :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노래 <가을편지>의 일부입니다.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면 한 번쯤 입에서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 이 아름다운 노랫말이 고은의 시입니다.
내 시의 자유란 하나의 율동이며 춤의 상태인 것을
저 파도에의 강렬한 기억과 함께 확인한다.
절로 노래하고 절로 춤추었다(11).
우리에게 고은 시인은 소개가 필요없는 시인입니다. 이 시집에도 그에 관한 소개를 딱 두 줄, 두 마디입니다. "시인 생활 56년, 시집 여럿." 참 멋드러진 소개입니다.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할까 싶습니다. 우리에게 고은은 노벨문학상 후보에 거론되며 대한민국의 자존심이 되었지만, 그보다 먼저 우리는 그의 시를 노래했고 사랑했습니다.
나의 내면의 마그마는 저 우주에 산재하고 있는 암흑물질 가운데
아직 태어나지 않은 별들의 가능성과 연결되기를 꿈꾼다.
그래서 나는 항상 뜨겁다.
나는 내 무수한 시들의 어제 그제 없는 가난과 내 시들의 내일 모레 글피의 무일푼으로 시 이전을 산다.
마침내 한 편의 시가 오리라.
그렇게 오는 시가 나이다. 나는 없다.
아, 내 시는 내 조국의 안과 밖에서 울고 있는 아이의 미래일 것이다(12-13)
<시의 황홀>은 고은 시인이 평생 써온 시 전편에서 100편의 시구를 고른 것입니다. 고인이 시인이 직접 쓴 시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짧은 글이지만 고은 시인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고은 시인을 향한 얄퍅한 사랑이 부끄러워집니다. 시집 한 권 제대로 읽은 적이 없으면서 노벨문학상 수상을 응원하고 염원한다 소란을 떨었으니 말입니다.
바람이 사람일 때가 있다
그와 함께 이야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대화> 일부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이 시를 읽었습니다. 내려야 할 곳에 내리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외로움이라는 감각을 잊고 살만큼 마음이 둔해져 있었는데 그게 건드려졌나 봅니다. 시가 읽고 싶은 날은 외로운 날입니다.
폭포 소리 한 복판에서
나는 폭포를 잊어먹었다 하
언제 내가 이토록 열심히
혼자인 적이 있었더냐
<폭포> 일부
폭포 소리 한 복판에서 폭포를 잊은 시인처럼, 나는 사람들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틈바구니에서 세상을 잊었습니다. 세상의 소란이 제거되고 오롯이 나를 마주했을 때 당황했고, 어쩐지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난데 없는 물음이 튀어나왔습니다. "너는 누구냐?"
오늘도 누구의 이야기로 하루를 보냈다
돌아오는 길
나무들이 나를 보고 있다
<순간의 꽃> 한 토막
비평가 김형수는 이 시를 이렇게 읽습니다. "말도 많이 퍼내면 존재가 비워지는지 모른다. 실컷 떠들고 났을 때 찾아오는 공복감. 정신적 공허뿐 아니라 육체적 허기까지 곁들여진 허망의 느낌. 우리는 자주 그런 상태로 귀가한다"(65). 이제는 귀가길이 아니라 출근길까지 나를 좇아오는 허망의 느낌. 아침마다 정신 없이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사람들의 물결을 보면 숨이 막혀옵니다. 저는 저들이 온 방향으로 가려 하고 저들은 내가 지나온 방향으로 가려 하고. 그때 찾아오는 현기증이 이 시에서 느껴졌습니다. 서커스단의 어린 코끼리는 말뚝에 매여놓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길들여지면 자기 힘으로 그 말뚝을 뽑아버릴 만큼 힘이 세져도 도망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내가 반복되는 공허로부터 힘써 도망가지 못하는 건,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길들여졌기 때문이라는 자각, 나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더했습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나 같은 것이 살아서 국밥을 사 먹는다
SNS에서 본 글입니다. 영화 <변호사>를 보았을 때도, 외할머니가 안타깝게 돌아가셨을 때도, 세월호 사건 때도 이 시를 떠올렸습니다. 누군가 세월호 사건 때 이 시를 SNS에 올리며 "고은의 시인데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답니다(107). 나는 이것이 고은의 시인줄도 몰랐는데, 이 시는 처음부터 제목이 없었다고 합니다. 공감이란 깊은 위로이기도 하다는 것을, 시인의 자기 혐오의 감정에서 위로를 받았을 때 알았습니다.
옷소매 떨어진 것을 보면
살아왔구나! 살아왔구나!
<여수 158 전문>
고은 시인의 시에는 인생감이 서려 있습니다. 김형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은의 인식 속에서 도덕이나 지식보다 우선하는 것은 언제나 살아있음 그 자체이다. 그것은 번개처럼 번뜩이고 물결처럼 출렁이고 심연처럼 고요해지는 동사들로 이루어져있다. 그래서 삶에서 사소하고 의미 없는 순간은 없다"(83).
갓난아기로 돌아가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가 왜 없으리
삶은 저 혼자서
늘 다음의 파도 소리를 들어야 한다
<두고 온 시> 일부
<시의 황홀>은 나에게 "다음의 파도 소리"와 같았습니다. 그의 시는 웅변하는 가르침이 아니라, 햇살처럼 마음에 스미고 파도처럼 강렬하게 밀려들고 외로운 바람처럼 온몸을 스쳤습니다.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사랑하며 살자 싶습니다. 100편의 시구말고 전편을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어릴 때는 절로 외워지는 시구도 있었고, 애써 외우고 싶은 시구도 있었고, 노트마다 옮겨 적었던 시들도 많았는데, 요즘은 검색만 하면 바로 시가 뜨는 세상이다 보니 오히려 마음에 담아둔 시가 적어졌습니다. 여기 옮겨 적은 시들은 절로 마음에 담긴 시입니다. 이제 진심으로 고은 시인을 응원할 때 조금은 덜 부끄럽고, 덜 미안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