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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달의 시네마 레시피 - 영화 속 디저트부터 만찬까지 한 권에!
정영선(파란달) 지음 / 미호 / 2014년 6월
평점 :
품절

"요리가 등장하는 영화는 보통 그 음식들이 상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339).
감동적인 영화 한 편을 보고 나면 나도 모르게 무엇인가와 꼭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몇 날 며칠 남자 주인공을 떠올리며 가슴앓이를 하기도 하고, 사랑스러운 여자 주인공을 닮고 싶어 그녀를 연구하기도 하고, 한 편의 시를 외우듯 마음을 울린 명대사를 외워서 일기장에, 블로그에, 다이어리에, 노트에 적어놓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적어넣기도 합니다. 거리를 걷다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영화 음악 때문에 발걸음이 멈춰지기도 하고, 영화에 등장했던 아름다운 촬영지를 찾아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파란달 시네마 레시피>는 영화 속 요리와 사랑에 빠진 책입니다.
"요리가 등장하는 영화는 보통 그 음식들이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하는데, 그런 맥락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봄날은 간다"였습니다. 은수(이영애)가 상우(유지태)에게 "라면 먹고 갈래요?"라고 먼저 말을 걸었던 장면. 그 특별할 것도 없는 한마디가 굉장히 유혹적으로 들렸고, 그렇게 둘은 사랑을 시작했으니까요. 요리는 아니지만 생수를 마실 때 생각나는 영화의 한 장면도 있습니다.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큰 생수통을 입에 대고 벌컥 벌컥 물을 들이키는 춘희(심은하)의 털털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모습. 그 장면 위로 오버랩 되는 대사 한 마디. "사랑이란 게 처음부터 풍덩 빠져 버리는 건 줄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가는 것인 줄은 몰랐어." 이 한마디가 아직도 제 가슴에 아리게 박혀 있네요. 그 영화를 보기 전까지 저도 풍덩 빠지는 사랑만 기다렸지, 사랑이라는 게 서서히 물들어갈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파란달의 시네마 레시피>는 이렇게 저자의 기억 속에 선명한 자국을 남긴 영화 이야기와 함께, 그 영화 속에 등장하는 요리를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도록 레시피를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방송작가로 8년, 요리 전문가로 8년"을 거쳐 왔다는 저자는 이력을 증명하듯 영화 이야기도 참 아기자기하게 들려주고, 요리도 참 멋스럽게 연출해주었습니다.

"난 내 평생보다 그 하루를 더 잘 기억해"(54).
<파란달의 시네마 레시피>라는 제목을 보면 영화를 매개로 하지만 영화 속 요리 이야기나 레시피에 더 무게를 둔 책이라는 예측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예측과는 달리 오히려 영화 이야기에 더 무게를 두고, 레시피는 덤 또는 부록이라는 느낌이 더 강합니다. 요리 책이 아니라 "영화 속" 요리 이야기라는 것에 더 끌렸던 저는 아무래도 괜찮았지만, 요리가 나타내는 어떤 상징이나 의미의 분석, 또는 본격적으로 요리 따라하기를 기대했던 독자는 다소 실망스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분석이나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 "비포 미드나잇" 이야기에서는 "영화 속 메뉴 따라하기"로 그리스식 샐러드를 꼽았는데,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영화 초반, 사람들이 함께 식사를 준비하는 장면과 그리스 식탁을 차려놓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은 식탁에 함께 앉은 젊은 커플, 중년의 부부인 제시와 셀린느, 노년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각각 연인의 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비포 시리즈를 한데 모아둔 것처럼요"(58).
한 편 한 편 파란달님이 소개해주는 영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스치듯 등장하는 요리 속에 희망, 추억, 도전, 행복, 치유, 환영 같은 키워드가 숨어 있으니 보물찾기를 하듯 감상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한 방법이 될 듯합니다.

"프라이 팬 위에서 뭔가를 뒤집을 때는 자신감을 가지세요! 잘 뒤집어지지 않으면 어떤가요? 보는 사람은 나뿐인데!"(296)
<파란달 시네마 레시피>는 "영화 읽어주는 라디오"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떤 영화는 다 아는 내용인데도 듣는 재미가 어찌나 쏠쏠한지 추억을 곱씻듯 읽었습니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와 같은 영화는 보면서도 별 감흥이 없었는데 이렇게 깊은 의미를 담은 영화였나 다시 보였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나 "만추"와 같은 영화는 저자의 이야기에 솔깃해져 꼭 챙겨보려 따로 메모를 해두었습니다. 주변 사람을 황당하게 만드는 미친 남자와 그 미친 남자를 환장하게 만드는 더 미친 여자가 인상적이었던(?) "실버라이닝 플레이북"도 재미있게는 보았지만 내가 놓친 명장면이 있다는 걸을 알았습니다.
"난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너만 찾아다닐 거야. 악착같이 너 찾아서 다시 너랑 사랑할 거야"(번지점프를 하다, 96), "우리가 고통스러운 건 사랑이 끝나서가 아니라 사랑이 끝난 후에도 사랑이 계속되기 때문인 것 같다"(시월애, 107)와 같이 내가 사랑한 명대사를 다시 만난 것도 제게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인생에서 있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화양연화(花樣年華)라 부"르는데, "그들에게 화양연화는 대단히 특별한 날이 아닌 함께 비를 피해 서 있던 처마 밑, 같이 소설을 읽으며 웃었던 어느 공간, 외로움을 달래주기에 충분했던 레스토랑에서의 순간들일 겁니다"(119)라는 한마디가 나를 울리기도 했습니다.
이 책 때문에 한동안 책보다 영화를 더 열심히 챙겨보게 될 듯합니다. 아름다운 영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영화가 맺어준 무엇인가와 사랑에 빠져 하릴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도 그 순간 나는 행복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