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지 러브 - 하나님과 지독한 사랑에 빠지다
프랜시스 챈 지음, 정성묵 옮김 / 아드폰테스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내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우리 삶에서 언행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227).

 

 

요즘 교회 다닌다고 말하기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각종 사건과 사고, 부정과 비리로 얼룩진 교회의 모습이 방송에 보도될 때마다 함께 비난의 손가락이 올라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너는 어떤대?"라고 물어보면 입이 다물어집니다. 교회가 언행불일치로 악명이 높은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책임이라는 사실이 아프게 깨달아지기 때문입니다.

 

<크레이지 러브>의 저자 프랜시스 챈 목사님은 교회가 "설교를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삶에 너무 익숙해져버렸다"(267)고 꼬집습니다. 사랑을 말하지만 사랑은 하지 않는, 희생이 고귀하다고 말하지만 희생하지는 않는, 교회의 언행불일치는 교회만 썩는 선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교회가 썩으면 세상은 더 지독한 악취를 풍기기 마련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따라 산다는 것이고, 예수를 따라 산다는 것은 삶에 지각변동이 일어나야 하는 대변혁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전복된 가치관을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목표는 '자기 주장', '자아 실현'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자기 부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영광을 위해 살지만, 그리스도인은 자기 영광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올라가야 하는 경쟁 속에 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경쟁에서 해방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살아야 하는 세상 사람들은 더 세고 큰 힘을 갖기 위해 밤낮없이 수고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더 사랑하기 위해 수고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 푼이라도 더 갖기 위해 혈안이고 악착을 떨지만, 교회는 애써서 번 돈을 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는 세상과 정반대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인들을 보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인지, 세상에 속한 사람인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하고도 내 삶에 지각변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닌 겁니다. "그리스도를 모든 행동과 삶의 중심에 놓아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 삶이 강이라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강을 거슬러 올가는 것이다. 헤엄치기를 멈추거나 열심히 헤엄치지 않으면 하류로 쓸려 갈 수밖에 없다"(123-124).

 

 

 

 

"세상에 미지근한 그리스도인은 없다. 미지근한 '교인'만 있을 뿐이고, 그런 교인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들을 천국에서 볼 일은 없을 것이다"(107).

 

 

<크레이지 러브>는 이러한 교회를 흔들어 깨우는 선지자의 외침입니다. 세상 가치관과 목표를 그대로 부여잡고 하나님을 자기 성취를 위한 도우미 정도로 여기는 교인들에게 다시 들려주는 복음이기도 합니다. <크레이지 러브>는 내가 "미지근한 그리스도인"은 아닌지 스스로 점검해보도록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께 찌꺼기를 드리는 자들은 아닌지 살펴보라고 강권합니다. 프랜시스 챈 목사님은 미지근한 상태에서 나와 예수님과의 지독한 사랑 속으로 뛰어들라고 격려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우주를 묵상하며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 깊이 깨닫고, "삶의 방식이 바뀔 만큼 죽음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유가 죄책감이 아니라 사랑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그리스도를 온전히 좇아야 한다고 말할 때,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라는 것입니다. "미국 교회는 그저 화목한 가정, 예의바른 자녀, 출석 교인이 머릿수만을 추구할 뿐이다. 성경의 참뜻에는 관심조차 없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도를 벗어나 불균형에 빠진 '급진주의자'이나 하는 깃으로 여길 뿐이다"(86). 이런 반응은 미국 교회만의 현상은 아닙니다. 한국 교회도 그렇고, 미국 교회도 그렇고,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가장 큰 복을 받은 교회들에 미지근한 성도들이 많다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해야 하는 박해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런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시스 챈 목사님은 중국 본토에 갔을 때 온갖 박해를 무릎쓰면서 예수를 따르고 있는 성도들에게 미국 교회에 관해 들려주었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미국 교회는 건물 크기에 연연하고 미국 교인들은 음악이나 아동 시설, 설교, 교회 식구들과의 부로하를 이유로 교회를 옮겨 다닌다고 말하자 여기저기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 그런 것을 기독교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웃기는 일이다"(246). 

 

 

 

  

 

"세상은 편안한 삶에 안주하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필요로 한다"(233).

 

 

예수 제자를 자체하는 사람들의 언행불일치의 삶을 보고 "기독교는 실패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기독교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시도되지 않은 기독교"라고 말합니다. 그런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발하면, 우리가 예수님과 지독한 사랑에 빠져 순종하는 삶을 살고자 시도한다면 넘어질 수는 있어도 실패할 수는 없다는 뜻도 될 것입니다.

 

<크레이지 러브>는 예수님과 지독한 사랑에 빠진 성도의 삶의 특징으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꼽습니다. "빈부 격차가 계속 이대로 유지되거나 더 심해진다면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162). 덧붙여리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는지 많은 증거를 보여줍니다.

 

고백컨데, 프랜시스 챈 목사님의 지적처럼 "예수님의 명령대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깊은 감동"을 느꼈지만, 정작 그렇게 "극단적으로" 살 수 있을까 생각하니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지금 내 통장에 들어있는 돈을 내가 알고 있는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는 일을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머뭇거려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도망치지 않고 성령님이 내게 들려주시는 음성에 계속 귀 기울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에게 프랜시스 챈 목사님의 한 마디 말이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처방은 '더 열심히 노력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맡기라는 것이었다"(137).  이 책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완전히 맡기는 삶에 대해 새로운 고민을 던져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갈등이 아니라, 설레이고 기대로 가득한 고민이기도 합니다. 더 이상 삶을 허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전심으로 항복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기대합니다!

 

 

 

"그분의 사랑에 대한 올바른 반응은

오직 예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뿐이다.

미친 사람은

가진 것을 전부 내놓고 목숨 걸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도 여전히 현실에 안주해 있는 사람들이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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