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왜 히가시노 게이고에 열광하는가?

 

자주 이용하는 작은 도서관에 가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책을 잘 읽지 않는 내 동생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것은 하룻밤에 뚝딱이다. 독서에 흥미가 없는 사람도 책을 읽게 만드는 그의 힘은 무엇일까? 추리소설이 주는 흥미도 있겠지만, 일본 추리소설 작가가 그 한 사람도 아니고, 다양한 작가의 작품이 소개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도 유독 히가시노 게이고의 명성이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그의 다작도 한 몫 하는 듯하다. 그처럼 많은 작품을 쏟아내는 작가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가히 글노동자라 할 만하다. 써내는 족족 화제가 되고, 감흥이 대표작에 미치지 못한다 해도 어쨌든 계속 읽힌다는 것. 이것이 그가 유명세를 이어가는 한 이유가 아닐까. 전문가들의 시각에서는 여러 가지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순수한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딱 한 가지이다. 뛰어난 스토리 감각! 그의 작품이 자주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어진다는 것이 그 단편적 증거가 아닐까.

 

그런데 문제는 그가 점점 명확한 추리와 논리보다 스토리에 더 집착하는 듯한 인상이다. "소재를 자유자재로 변주하는 능력"을 가진 "탁월한 이야기꾼"인 것은 맞지만, 추리물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애석한 일이다. <몽환화>도 본격 미스터리라고 하기는 어렵다. 일단 탐정이 등장하지 않는 추리소설이고, 책을 읽는 내내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보다 "어떻게 된 사연일까?"가 더 궁금하다고나 할까. 수수께끼처럼 던져진 두 개의 퍼즐조각(프로롤그)과 감추어진 비밀이 만나며 뜻밖의 묵직한 교훈도 얻었지만, 기가막힌 트릭과 명쾌한 추리(논리)가 주는 희열의 맛은 없고 잘 짜여진 드라마 한 편을 재미나게 보고 난 기분이다.





  

 

두 개의 퍼즐 조각과 묻지마 살인 사건

 

<몽환화>는 대낮의 느닷없는 강도 사건으로 시작된다. 정확히 말하면 평온했던 출근 시간에 벌어진 일이니 대낮은 아니지만, 그만큼 느닷없는 사건이었다. 이것이 프롤로그 1이다. 프롤로그 2는 나팔꽃 시장이다. 1년에 한 번 가족 행사처럼 치뤄지는 나팔꽃 시장 나들이. 그곳에서 그 집안의 둘째 아들은 한 소녀와 가슴 뛰는 만남을 가졌지만, 그 둘의 만남은 어느 날 갑자기 납득할 수 없는 이별로 끝이 난고 만다. 그리고 본격적인 이야기는 장례식장에서 시작된다. 왜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했는지 짚이는 데가 하나도 없는 한 청년(손자)의 죽음과 범인을 찾기가 가장 어렵다는 '묻지마 살인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파란 장미를 연구했던 꽃 연구가였다.

 

살해된 할아버지의 손녀와, 이제 청년이 된 나팔꽃 시장의 그 소년이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그 둘은 뭔가 숨겨진 비밀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들이 함께 사건의 진상을 쫒기 시작하면서 프롤로그에서 던져주었던 두 개의 퍼즐 조각이 전체적인 그림 속에 자기 자리를 드러내기까지 독자들은 책에서 쉽게 눈을 뗄 수 없다.

 



  

 

몽환화, 금단의 꽃

 
 

독자들은 얼핏 희귀 꽃을 둘러싼 추악한 음모가 얽혀 있을 것이라 예측하기 쉬운데,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역사적이며 사회적 함의를 담고 있기도 하다.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 한가지 힌트를 제공한다면 '과거가 현재를 지배한다'라고 해두자. 허락된 자들이 아니면 열어서는 안 되는 문. 주인공들이 그 금단의 문을 활짝 열었을 때, 그들은 오늘의 삶이 과거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세상에는 빚이라는 유산도 있다"(409)는 사실이, 원하지 않을지라도 내가 걸어가야만 할 삶의 길이 있다는 것을 새롭게 일깨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 작가는 범인을 동정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의 작품을 '다'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이 끔찍한 일을 저지른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그 어쩔 수 없었음'을 동정하고 만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작가 애니 프루는 "작가는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일의 무수한 가능성들 중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과 벌어져야만 하는 일을 이끌어내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벌어진 일과 벌어져야만 하는 일", 애니 프루는 <흐르는 강물처럼>(연암서가) 서문에서 저자 노먼 매클린이 "두 눈을 감고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작가라고 평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가 가장 잘 하는 일도 바로 그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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