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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신 판 ㅣ 세계문학의 숲 41
크누트 함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4년 3월
평점 :
"근대문학사에서 보면 함순은 20세기 100년 동안 가장 영향력 있고 혁신적인 문장가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그는 의식의 흐름과 내적 독백이라는 기법으로 심리 문학을 개척했으며, 토마스 만, 프란츠 카프카, 막심 고리키, 스테판 츠바이크, 헤르만 헤세, 어니스트 헤밍웨이 같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365).
<목신 판>은 노르웨이 문학의 대표 작가라는 크누트 함순의 소설입니다. 크누트 함순은 1920년 <흙의 혜택>이라는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입니다. 책의 뒷표지에 보면, "함순은 나에게 글쓰기를 가르쳤다"고 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말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이 한마디가 이 책을 읽어야 할 충분한 이유였습니다.
이번에 시공사에서 '세계문학의 숲' 시리즈로 출판한 <목신 판>에는 크누트 함순의 2편의 중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1894년에 발표된 <목신 판>과 1898년에 발표된 <빅토리아>가 그것입니다. <목신 판>은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토마스 글란 중위의 수기"라는 제목이 붙은 1부는 글란 중위가 2년 전 노르웨이의 노를란 지방에서 보낸 여름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글이며, "글란의 죽음"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2부는 (제목이 스포인테) 한 정체모를 사람이 밝히는 글란 중위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남자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라는 점에서 <목신 판>과 뼈대가 비슷해 보이는 <빅토리아>는 현실적 장벽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한 남녀의 슬픈 사랑을 그린 "순수한 멜로드라마"(361)입니다.
문학사적 위치와 가치를 떠나 그저 내용만 음미해 보면, <목신 판>과 <빅토리아>는 "남자가 사랑할 때"라는 말이 연상됩니다. 특히 <목신 판>은 다소 변덕스러워 보이는 여자의 행동과 사랑 고백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는 남자의 심리가 잘 그려져 있습니다. 주인공 글란 중위는 "목신 판", 그러니까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목축의 신이고 목동의 수호신"인 '판"과 같은 남자입니다. 스스로 "숲과 고독에 속해" 있다고 고백하는 글란 중위는 외딴 오두막에 이솝(개)과 함께 머물고 있습니다. 가끔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사냥과 낚시를 하며 자연의 숨결과 함께 호흡하며 사는 데 익숙한 사람입니다. 이 책은 그가 자연과 함께 교감하며 느끼는 충만한 행복이 아름다운 언어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런 글란 중위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는 서투르기만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컵과 술잔을 깨뜨리기도 하고, 사랑하는 여자의 구두를 바다에 던져 버리기도 하고, 그 여자와 다정한 남자의 귀에다 침을 뱉는 이상 행동을 보이기도 합니다. <목신 판>은 변덕스러운 여인의 사랑 때문에 혼란스러운 남자의 심리가 잘 묘사되어 있기도 합니다.
"밤에 나는 모든 게 다 끝났다고 생각했고, 결심을 굳혔다. 이 변덕스러운 사람 때문에, 머리가 텅 빈 이 계집애 때문에 왜 내가 눈먼 장님이 되어야 하는가? 그녀의 이름은 이미 오랫동안 내 가슴에 꽂혀 내 가슴을 다 빨아 없애지 않았던가? 이제 충분하다! 어쨌든 나는 그녀에게 냉담하게 굴고 그녀를 조롱하는 방법으로 오히려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아아, 나는 얼마나 매력적으로 그녀를 조롱했던가"(124).
<빅토리아>도 분위기가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하지만 서로에게 다가갈 수 없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슬퍼하는 두 남녀의 애절함과 고뇌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가장 강렬한 인상은 문장이 아름답다는 것, 그리고 남자가 사랑할 때 휘말리게 되는 격정을 읽는 즐거움이었습니다. 사랑은 매혹적이지만, 또 얼마나 잔인한지요. 행복감으로 그 영혼을 가득 채웠다가도, 연인의 사소한 몸짓 하나가 한순간 지옥불에 휩싸이게 만들어버립니다. <목신 판>과 <빅토리아>는 각각 1894년과 1898년에 발표된 책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 우리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시절의 사랑 이야기인 셈입니다. 그러나 역시 사랑의 감정은 시대를 초월하고, 문화를 초월하여 동일한 것인가 봅니다. <목신 판>과 <빅토리아>의 사랑 이야기는 한결같이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지만, 그렇다고 사랑의 환멸에 빠져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에 태워지는 젊음을, 그 생기를, 그 혼란을, 그 야비함을, 그 정열을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이 책의 뒷편에 실린 "해설"을 읽지 않았다면 문학으로서 <목신 판>과 <빅토리아>의 가치와 의미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해설"을 먼저 읽고 작품을 읽는 것도 이 책을 읽는 한 방법일 듯합니다. 문학사적 의미로도, 문학적 아름다움으로도, 순수한 로맨스 소설로도 읽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