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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변태
이외수 지음 / 해냄 / 2014년 3월
평점 :
"오늘도 몰수된 젊은 날의 꿈들은 반환되지 않으리라. 오늘도 실종된 자아는 되돌아오지 않으리라"(새순, 115).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렇게 단숨에 읽은 책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외수 선생님의 <글쓰기의 공중부양>에 보면 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그놈은 흉기로 자주 자해를 하는 습관이 있다,
라는 문장보다는
그놈은 뻑하면 회칼로 자기 배를 그어대는 습관이 있다,
라는 문장이 훨씬 선명한 전달력을 가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흉기와 자해라는 사어 대신에 회칼이나 배를 그어댄다는 생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완전변태>는 이외수 선생님이 말한 그 선명한 전달력, 현장감과 생동감으로 충만한 언어의 향연입니다. 눈앞에서 그림을 그리듯, 제 마음을 홀리는 문장들에 저절로 밑줄이 쳐졌습니다.
"잘 포장된 도로가 늦가을 식은 햇빛 속에 거대한 구렁이처럼 드러누워 있었다"(13).
"문득 청춘이 두엄더미처럼 썩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23).
"창살 사이로 들어온 초여름 햇살이 그의 머리와 어깨를 흥건하게 적시고 있다"(83).
"그는 유년시절부터 빈곤이라는 이름의 악마에게 영혼을 물어뜯기면서 혼자 험난한 가시밭길을 맨발로 걸어온 예술교 신도였다"(181).
"사방에 단풍이 축제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195).
그런데 이 아름다운 언어 안에 담긴 '메시지'는 누군가의 비유처럼 "날카로운 송곳" 같습니다. 매서운 통찰, 격분에 차서 마음껏 비웃어주는 해학적인 풍자가 우리 사회의 썩은 부분을 인정사정 없이 도려내는 듯합니다.
"대한민국은 돈을 종교처럼 숭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나라였다. 젊은이들마저도 돈이 없으면 공부할 자격도 없고 돈이 없으면 사랑할 자격도 없다는 말을 서슴지 않을 정도였다. (…) 돈이 없으면 교회에도 절에도 다니기가 미안할 정도였다"(15).
"그런데 젊은이. 법나무에는 법이라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던가"(27).
"그는 세상이 썩었다는 사실에 격분하고 있었다. 썩지 말아야 할 것들이 더 썩었다는 사실이 격분에 기름을 끼얹고 있었다. 종교, 교육, 예술. 이 세 가지는 세상을 썩지 않게 만드는 방부제의 역할을 해야 한다"(192).
"그들은 조건과 배경을 선택해서 결혼하려는 오류를 당연시한다. (…) 그들은 재력과 권력과 학력을 미신처럼 신봉한다"(221).
눈치 채셨겠지만 이 소설은 다분히 "계몽적"입니다. 가르치려는 속셈이 훤히 보입니다. 그러니까 문학을 읽고 저절로 차오르는 미학에 심취하며, 스스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독자들은 이렇게 노골적으로 누군가를 가르치려드는 소설이 불쾌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독자들과 오랫동안 소통하며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작가로서 꿈과 자아를 몰수 당하는 청춘들을 그냥 보아넘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총 10편의 단편이 실린 <완전변태>에서는 이외수 선생님이 소설 속 인물로 '완전 변태'하여 현현한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첫 번째 단편 <소나무에는 왜 소가 열리지 않을까>에서는 사법고시 합격으로 흥분하여 달려가는 청년을 불러 세우는 도인 같은 '노인'의 모습에서, <해우석>에서는 탐석광인 아버지에게 진짜 돌을 들이미는 다섯 아들의 모습에서. <새순>에서는 모두가 외면하는 폭력 앞에 서슬 푸른 노기를 띠고 지팡이를 휘두르는 노인의 모습에서, <명장>에서는 "명품은 모조리 장도리로 박살 내버리고 자신을 그대로 빼닮은 아집 한 덩어리만 덩그러니 남겨놓는"(135) 모습을 한탄하는 아주 특별한 시감각을 소유한 노인의 모습에서, <대지주>에서는 200자 원고지에 특수작물(글)을 경작하는 순박하지만 당당한 한 사나이의 모습에서 소설 속 주인공으로 완전 변태한 이외수 선생님이 보였습니다.
주로 지혜로운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외수 선생님은 <소나무에는 왜 소가 열리지 않을까>에서는 사법고시 합격으로 흥분한 청년에게 "법나무에는 법이라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야 한다"는 돌직구를 날리고, <새순>에서는 매질을 당하는 아이를 보고도 못 본척 하는 군중들의 "가슴밭에 양심이라는 이름의 새순 하나가" 얼굴을 내미는 꿈을 꾸고, <파로호>에서는 미친 세상에서 미쳐버린 듯한 기자의 모습을 환상적으로 그려내고, <유배자>와 <흉터>에서는 썩어버린 예술과 종교를 조롱하고, <청맹과니의 섬>과 <해우석>, <명장>, <대지주>에서는 본질을 잃어버리고 허영으로 가득찬 우리의 꿈 아닌 꿈을 비웃습니다.
그러나 위의 단편에서는 완전 변태를 이루었던 이외수 선생님이 정작 <완전변태>라는 단편 속에서는 직접 현현을 시도합니다. 대마법 위반으로 "나동 205호"에 입방한 "고명하신 (작가) 선생님"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동시에 그 "고명하신 작가 선생님"과 한 방에서 애벌레 놀이를 하는 청년의 모습으로 이중 현현을 합니다. "대마초를 피우고 호랑나비가 되는 꿈"을 꾸다가 들이닥친 마약 단속반에게 끌려와 "고명하신 작가 선생님"과 함께 수감된 이 청년은 이외수 선생님의 '꿈'이기도 한 것입니다.
몽환 속에서 호랑나비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이 애벌레 청년은 "대마관리법이 위헌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꿈꿀 자유를 박탈하는 악법 중의 악법이기 때문에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꿈이 죄가 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꿈에 한 욕설은 욕설이 아니요, 꿈에 한 방화는 방화가 아니며, 꿈에 한 살인은 살인이 아니므로 무죄라는 것이다"(96).
그는 대마가 "인체에 미치는 해닥도 담배의 5분의 1 정도밖에 안 된다"는 상세한 지식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외수 선생님은 스스로를 변호하고 싶으셨던 것일까요, 꿈까지 통제하려 드는 법무부의 정체를 폭로하려는 것일까요, 꿈에는 위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고 설득하려는 것일까요, "꿈꿀 자유를 박탈당하지 말라"고 선동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이 모두일 수도 있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회를 고발하는 한 선지자가 다시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겠다 결심을 하다가도 그것을 외치지 않으면 심장에 불이 붙어 뼛속까지 타들어가니 외치지 않고는 답답하여 견딜 수 없다고 절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그 선지자를 생각했습니다. <완전변태>는 역설적이고 해학적입니다.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나옵니다. 그런데 이 어처구니 없는 웃음에는 분노가 숨어 있습니다. 파괴적이고 폭력적으로 들끓는 분노가 아니라, 다시 꿈꾸고 다시 시도해보려는 슬픔이면서 희망이기도 한 분노입니다. <완전변태>는 가볍게 웃으며 읽어도 좋을 소설이고, 날카롭게 비판하며 읽어도 좋을 소설입니다. 여하튼, 아름답고 재미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