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어웨이 -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가장 황홀했던 그날
앨리스 먼로 지음, 황금진 옮김 / 곰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그렇다면 앞으로 무엇에 마음을 쏟아야 할까? 어디서 살아 있다는 느낌을 찾아야 할까?"(런어웨이, 54)

 

 

미치도록 이해받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 말로는 설명이 잘 안 되지만 누군가 소리없이 끓어넘치는 내 마음을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해받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일 것 같은 그런 순간말입니다. 단편 소설의 거장이자, 201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앨리스 먼로의 소설이 제게는 딱 그런 소설입니다. 총 8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책에서, 이해받고 싶었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순간들과 불현듯 마주쳤습니다. 얼마나 정밀하게 포착해냈는지, 꼭 꽁꽁 숨켜두었던 것을 들킨 기분입니다. 그때마다 마음에서 쩍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얼음판이 쩍하고 갈라지듯이 말합니다.

 

1931년에 태어나 이제 80대 할머니가 된 앨리스 먼로는 누구보다 여자를, 여자의 삶을 잘 이해하는 작가입니다. 그래서인지 나와는 시대적 환경도 다르고 문화적 배경이 다른데도, 주인공들의 삶이 낯설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거실로 가 남편을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슬픔이 목까지 차올랐다. 샤워의 열기 때문에 눈물샘이 터진 게 틀림없었다. 클라크에게 기댄 칼라는 그대로 무너지며 엉엉 흐느껴 울었다.

클라크가 기보드에서 손을 떼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한테 화내지 말아줘." 칼라가 울면서 말했다.

"화난 거 아니야. 당신 이러는 거 너무 지긋지긋해, 그뿐이야."

"당신이 화를 내니까 내가 이러지."

"내 핑계 대지 마. 난 당신 때문에 숨이 막할 지경이라고. 저녁준비나 해"(런어웨이, 21).

남편과의 가벼운 외출을 준비하며 빨래방에도 가고 카페에도 가려고 생각했던 아내의 (다소) 돌발적인 행동과 남편의 반응입니다. 여자와 남자의 차이, 그리고 미묘한 감정선의 묘사가 정말 세밀하다고 감탄했던 장면 중의 하나입니다.

 

순전히 <런어웨이>라는 제목 때문이겠지만, 8편의 단편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읽었습니다. 남편으로부터(런어웨이), 현실로부터(우연), 가족으로부터(머리않아, 침묵), 따분한 일상으로부터(열정), 과거의 허물로부터(허물), (어쩌면) 나로부터(반전), (어쩌면) 불확실함으로부터(힘) 말입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현실로부터 도망치려 하는구나. 젊은이들은 오늘과 다른 내일로, 그렇게 기대했던 '내일'에 도달한 늙은이들은 도망쳐온 과거로. "하지만 낸시 자신이 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일, 시간만 나면 하고 싶은 일은 과거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기보다 과거를 끄집어내 자세히 살피는 것이다"(493).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속에 살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과거를 되새김질하며 다시 과거로 여행을 떠나는 인생. 참 아이러니합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시간은 '현재'뿐인데 말입니다. 만일 '미래'나 '과거'가 없다면 우리의 시간(현재)은 무엇으로 채워질까요.

 

앨리스 먼로의 단편집을 2권 읽은 것이 다이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푹우처럼 몰아치지도 않고 흡착기처럼 강하게 빨아들이는 느낌도 없습니다. 자극을 좋아하는 청춘들에게는 다소 지루할 수 있고, 강렬한 것을 찾는 독자에게는 다소 심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폭풍처럼 휘몰아치기보다 느릿느릿 산책하듯 책을 읽는 독자라면, 잔디밭에 한가롭게 앉아 깊은 사색 속에 잠겨보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을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삶은 온통 뒤흔들어놓는 혼란, 기쁨, 열정, 사랑, 환희, 파국, 오해와 같은 거창한 것들이 모두 우리가 사소하게 흘려보내는 일상 속에서 튀어나온다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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