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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는 아이 - 울지 않는 아이가 우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ㅣ 울지 않는 아이가 우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12월
평점 :
(이 책을 읽고 친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너를 생각했어.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문든 정신을 차리고 보면 속으로 너에게 자꾸만 편지를 쓰고 있더라. 이 책은 에쿠니 가오리의 에세이집이야. 8년 동안의 글들을 1996년에 모은 것이니, 2014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너무 늦게 배달된 편지 같은 느낌도 든다. 기억나? 우리가 장난처럼 놀이처럼 자꾸만 되내었던 영화 제목 <냉정과 열정 사이>. 아마도 에쿠니 가오리가 그 영화의 원작자라는 것만으로도 너는 이 책에 흥분을 할 것 같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첫 장부터 불륜을 고백하는 작가 때문에 잠시 당황하기도 했어. "한 사람을 만나 사랑했다, 그 사실이 전부이고 그것은 아주 자랑스럽고 행복한 일이니까, 그 사람에게 가정이 있다고 슬퍼할 필요는 없잖아요? 적어도 나는 줄곧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18)라고 하더라. 씩씩하게 말하는데 왜 이리 안스러운지. 이 대목에서 우리가 마주 앉았던 어느 카페가 생각났어. 오래 만나던 그와 헤어진 후, 그와 나눠낀 반지가 네 손에서 사라진 후, 너는 그 빈손가락을 자꾸만 만지작 거렸지. 다친 손가락의 피를 멈추게 하려고 힘 주어 꾹 누르는 듯이, 자꾸만 그 빈 자리를 눌러대던 너. 사랑은 여전히 아프다.
에쿠니 가오리는 여동생을 아주 좋아해. 둘도 없는 친구 같은 동생과 쿵짝이 아주 잘 맞아. 함께 디즈니랜드에 가서 "신 난다고 신 난다고 몇 번이나 말"을 하는 그녀의 천진한 모습 위로, 우리의 추억이 겹쳐지기도 했어. 아무 말 없이 아이스링크를 몇 시간이고 바라만 보고 있던 일, 분수 안 항아리에 동전을 던지며 소원을 빌던 일(동전이 들어가지 않으면 어쩌나 어쩌나 얼마나 떨렸던지), 폐장시간이 지난 것도 모르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수다를 떨다 길게 늘어서서 인사를 하는 언니들 앞으로 총총 뛰어나오며 부끄러워 했던 일까지, 우리 추억도 한 편의 이야기가 될 것 같았어.
에세이를 좀처럼 읽지 않고, 에세이를 읽을 때 메모를 하는 일이 별로 없는 내가 이 책에 제법 줄을 많이 그었어. 내가 밑줄을 친 문장들은 이래.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잇는 돌다리가 있으면 좋겠다(다리에 소망을......, 22).
차를 마신다는 것은 시간을 멈추게 하는 행위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오후의 홍차와 장미의 나날, 49).
따라서 어른스러운 책은 첫 페이지를 살짝 넘기기만 해도, 그 속에 그 책 특유의 시간이 흐른다(아기 사슴 '밤비', 83).
여행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혼자이고 싶은 것이다. 낯선 장소에 덩그러니 혼자 존재하다가, 곧 다시 그곳을 떠나간다는 것, 가령 그 창문과 테이블과 커피 잔이 나 또는 내 생활과는 무관하게 거기에 늘 존재한다는 것. 그 정당함과 안도감. 다른 시간의 흐름에 잠시 머무르는 것이리라. 또 그런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왠지 소설 속의 등장인물 같다(혼자서 찾집을, 194- 195).
나는 착각과 전제가 하나도 없는 곳에 있고 싶다(왜 쓰는가, 202).
그 중에서도 너에게 소리 내어 읽어주고 싶은 대목은 이 부분이야.
<어 맨 인 러브>란 영화에, "그런 게 인생이야. 멋진 추억 많이 만들어"라는 대사가 있습니다. (...) 우리 커핑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으며 새로운 사랑 얘기를 해요. 우리는 참 지칠 줄을 모르는군, 하며 신 나게 웃어요(랄프에게, 20-21).
이 아름다운 문장이 눈부시면서도 조금 슬퍼지는 이유는 뭘까. 삶의 환희 속에서도 우리는 눈물을 흘렸고, 이젠 눈물 속에서도 삶의 환희를 느낄 줄 아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까.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아야 했던 그 시절을 이젠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까. 우리도 카페에 앉아 브런치를 먹으며 새로운 사랑 얘기를 하자. 우리는 참 지칠 줄 모른다, 하며 신 나게 웃자.
에쿠니 가오리의 일기장 같은 이 책을 너에게 주고 싶다. 그녀의 이야기 속에 우리의 시간도 흐른다. 엉뚱하고, 게으른 듯 열정적이고, 좋아하는 것에 마음을 잘 빼앗기고, 혼자서도 잘 놀 것 같은 그녀를, 너도 금방 좋아하게 될 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