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길리아드
마릴린 로빈슨 지음, 공경희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10월
평점 :
77살의 아버지가 7살 아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편지.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상속자'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습니다. 우연히 한 장면을 보았는데, 고등학교 학생들이 집안의 재계 서열을 운운하며 건방을 떨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으로서 서로의 성품이나 재능, 그 사람만의 색깔에는 관심이 없고, (그들만의 세상에서) 오로지 부모의 재산에 의해 개인(학생)의 가치가 판단되고 있습니다.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을 '상속자'라는 이유만으로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힌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이 드라마가 몇 세 미만의 아이들에게 시청 불가한 작품인지 궁금했습니다.
<길리아드>는 77세의 노목사가 죽음을 앞두고, 7살의 어린 아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길리아드>는 마치 누군가의 자전적 고백처럼 읽혀, '소설'이라는 것을 깜빡 잊기도 했는데 화자인 '존 에임스 목사'는 어디까지나 작가의 상상이 빚어낸 인물입니다. 아직은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늙은 아버지는 성직자로 살아온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다정하게 풀어놓습니다. 이 노목사의 인생 이야기는 역시 목사였던 그의 아버지, 또 역시 목사였던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뿌리와 가지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로 연결된 이들의 이야기는 미국 역사라는 밑그림 위에 그려지며 아름다운 색채를 덧입어갑니다.
<길리아드>는 루게릭 병을 앓는 노스승과 제자가 나누는 대화로 많은 감동을 주었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남을 착취하는 삶이 싫어 '선생'을 직업으로 택했다는 모리 선생님처럼, 성직자로서 선한 삶을 살고자 애썼던 존 에임스 목사의 인생은 평범하지만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름다움과 순간순간 마주하는 인생의 소중함에 눈 뜨게 해줍니다.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젊은이들이 서로 깔깔 데는, 별 뜻 없는 장면에서도 삶의 환희를 느끼게 해줍니다. 교회에 걸어가던 길에 만난 젊은 커플을 보면서도 신의 축복을 느낍니다. "젊은 커플이 내 앞에서 걷고 있었지. 장대비가 내린 후에 햇살이 쏟아졌고, 나무는 젖어서 반짝거렸지. 어떤 충동이, 충일한 느낌이 밀려왔는지, 남자가 펄쩍 뛰어올라 나뭇가지를 붙잡았지. 반짝이는 물방울이 쏟아지자, 두 사람은 웃으면서 달아났어"(47).
존 에임스 목사는 이 모습을 지켜본 감상을 이렇게 술회합니다. "그런 순간이면 물이 만들어진 주목적은 축복을 위해서고, 채소를 키우거나 씻는 데 쓰기 위함은 두 번째라고 믿고 싶긴 하다만. 그런 것에 더 관심을 두었더라면 좋았으련만. 내가 이상한 것들을 후회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누가 알 수 있겠니. 이곳은 흥미로운 행성인 것을. 어떤 것이든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있지."
노목사인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남겨줄 수 있는 유산은 몇 권의 책과 자신의 삶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설교 원고 뭉치, 그리고 이 편지가 전부입니다. 값나가는 재산은 없지만 아버지와 할아버지로 이어지며, 또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는 삶의 유산은 매순간 선하게 살려고 애쓰는 마음, 그리고 삶을 대하는 진실한 태도입니다. 노예 해방을 위해 북군으로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노목사의 할아버지는 전투 중 심한 부상을 입어 한 쪽 눈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아들에게 아버지(할아버지)가 처음으로 한 말은 "난 이 일에서도 큰 축복을 찾을 것으로 확신한단다"였어(58)라고 합니다.
인생을 되돌아보는 노목사는 "가장 고생한 일 때문에 웃게 되더구나"(33)라고 고백합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살아보니 돌아보면 가장 고생했던 일 때문에 웃게 되고, 그 고생을 함께했던 가족에 감사하게 되고, 그것을 지켜봐주는 친구 때문에 충만한 행복을 느끼게 되는 듯합니다. <길리아드>는 그렇게 우리가 별 일 아닌 것이라고 무시하며 살아가는 일상, 불행이라고 탄식하는 고통 속에도 축복이 있다는 것을 잔잔하게 알려주는 책입니다.
책의 제목인 <길리아드>는 구약성서에 "길르앗"이라고 번역되어 나오는 지명입니다. 작가는 책의 제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프거나 다친 사람들을 치유하는 데 효과가 있었다는 발삼나무는 성서에 나온 '길리아드'라는 지역에서 서식하였는데, 이로 인해 '길리아드'라는 이름은 특유의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의 이름 '길리아드'는 정신적, 육체적 온전함에 대한 소망, 특별히 친절과 정의와 관련이 있습니다"(8). 제목이 상징하는 것처럼 <길리아드>는 상처난 일상을 치유하는 향료 같은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은 '착함'이 지루한, 답답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 세상이라 이 책에 가득한 '선함'이 어쩌면 "뻔하다"는 느낌을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이제 긴 잠을 자야 하는 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삶의 기록들은, 평범한 일상에 대한 경외감과 함께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남겨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진지한 고민을 하게 만들어줍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우리 아버지의 인생을 한 남자의 그것으로 객관화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