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와 성화
김세윤 지음 / 두란노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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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윤리와 분리된 신앙을 가르치고 믿는 한국 교회의 비극"을 낳았다.

 

 

한국 교회에 한참 유행하던(?)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정말 구원을 받았는지 다시 점검해야 한다고 겁을 주기도 했고,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 개발되기도 했습니다. <칭의와 성화>를 쓰신 김세윤 박사님은 바로 이와 같은 한국 교회의 신앙 양태에 일침을 가합니다. "우리는 은혜로, 믿음으로 이미 의인이라 칭함 받았고, 그것은 최후 심판 때 확인되게 되어 있다. 그러니 그냥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면 된다"(80)는 식의 가르침은 구원파적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믿음(구원의 확신)과 생활을 분리하는 결과를 낳았고, 교회에서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삶의 문제는 소홀히 여기게 되는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밖에 나가서 전도를 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는 싫지 않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꼴보기 싫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복음을 증거할 사명을 가진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도리어 복음이 거절 당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어쩌다 교회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김세윤 박사님은 그 원인이 칭의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있다고 말합니다. 현재 한국 교회의 칭의론은 "의인으로서의 삶이 없으면서도 의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을 양산하는 교리, 심지어 의인으로서의 삶을 방해하는 교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94).

 

 

 

 

"성화를 칭의와 분리해서 사고하는 데서부터 '칭의론'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칭의론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형법적 범주로 이해하며, 대신적 속죄 행위로 해석한 것"(15)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무죄가 선언되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는 신분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요, 그 선물은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다수 개신교인들은 믿음을 윤리와 분리해서 이해하고, 윤리는 없어도 믿음만 있으면 자신들이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91). 김세윤 박사님은 칭의론에 대한 이러한 왜곡과 편향된 가르침이 "의로운 삶을 낳기는 커녕 도리에 방해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문제는 한국 교회가 칭의와 성화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칭의' 된 자는 '성화'의 과정을 거쳐서 '영화'(구원의 완성)에 이른다는, "구원의 서정의 틀" 안에서 칭의론을 설명해 왔습니다. 이 책은 본래 2012년 "두란노 바이블칼리지에서 주최한 종교개혁 기념 강의"를 책으로 펴낸 것입니다. 강좌의 원래 제목은 "성화란 무엇인가"였지만, 김세윤 박사님은 "성화를 칭의와 분리해서 사고하는 데서부터 '칭의론'이 왜곡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따라서 '성화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칭의론'의 구조부터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는 취지 아래서 강의(책)의 제목을 <칭의와 성화>로 바꾸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10).

 

 

  

성화는 칭의의 "현재 단계"이다.

 

 

<칭의와 성화>의 가장 주된 논지는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 수 없는 같은 개념이며, 그것을 하나로 통합하여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칭의론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새 관점 학파의 전제"가 도움이 되었습니다. 새 관점 학파는 "유대교가 근본적으로 '언약적 율법주의'의 종교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선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의 관계에로 '진입'했으니,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킴으로써 그 관계에 '머무름'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구조를 가지고"(82)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그런데 바울도 "은혜로 주어진 칭의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회복된(즉, 올바른 관계에 '진입한') 신자들에게 종말의 완성 때까지 그 관계에 계속 '서 있음'의 중요성을 강조"(82)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용하는 "칭의, 성화, 입양" 등은 인간이 죄 용서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회복됨을 나타내는 언어들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로/믿음으로 의인 된다는 말은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를 받음도 포함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서 있는 사람임을 뜻하는 것입니다"(163). "그 관계에 계속 서 있음"의 요구는 "우리가 사탄의 나라에서 옮겨져 하나님 나라로 들어왔으니 마땅히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라"(117)는 요구이기도 합니다.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의 구도에서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의의 열매'/'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칭의'에 뒤따르는 '성화'의 단계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김세윤 박사님은 성화는 "칭의의 현재 단계"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의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삶은 칭의 다음에 오는 성화의 단계가 아니라, "의인으로 칭함 받은, 즉 죄 사함 받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 우리가 '그 관계에 서 있음'의 단계"이며,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회복됨의 의미에 있어서 칭의와 동의어인 성화의 현재 단계"(173)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종교개혁적 전통에서는 칭의론의 법정적 의미가 강조되어 왔지만, <칭의와 성화>는 바울의 칭의론에는 관계적 의미도 있음을 설명합니다. 또한 바울의 칭의론을 "구원의 서정의 틀"이 아니라,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틀"로 이해해야 왜곡함 없이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칭의의 과정을 통합적으로 이해해야 '성화'의 삶의 동기가 강화된다.

 

 

<칭의와 성화>를 읽기 전까지, 칭의, 성화, 영화를 각각의 "단계"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이었는지 깨달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친다는 일이 얼마나 긴장된 일인지 새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또한  아무리 전통적인 권위를 가진 교리라 해도 화석처럼 굳어진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빛 안에서 끊임없이 검토되고 재해석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구원은 분명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이 "(인간 편에서) 아무 공로 없이" 주어진 것임을 강조하려는 사람들은 <칭의와 성화>에 여전히 신학적 이의를 제기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은 분명 윤리 그 이상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백성에게 요구되는 삶은 세상의 윤리보다 훨씬 고급한 것이며, 그 목표는 하나님과 같이 거룩해지는 최고의 수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성도는 <칭의와 성화>에서 전적인 은혜에 거룩한 삶으로 응답해야 할 성도(하나님께 드려진 사람) 된 자의 긴장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김세윤 박사님의 명쾌한 강의가 신학하는 즐거움을 다시 느끼게 해주었고, 신학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석학들의 생생한 논쟁들을 접할 수 있어 좋았고, 동시에 신학의 날카로움이 목회 현장을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칭의와 성화>는 세상에서는 손가락질 받으면서도 저희끼리는 '의인'되었다고 기뻐하는 천박한 신앙에 일격을 가합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구원론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구원의 핵심이 바로 칭의론입니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는 우선적으로 모든 목회자들이 읽어야 할 책입니다. 칭의론을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의 구원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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