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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첼로 - 이응준 연작소설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13년 7월
평점 :
사랑을 조롱하다.
성경에 보면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사랑의 시샘)는 지옥처럼 잔혹하며, 사랑은 아무도 끌 수 없는 타오르는 불길"이라는 표현이 나온다(아가서 8:6). 그리고 그 기세가 신의 불과 같다고 말한다. 사랑은 분명 매혹적이고 행복한 감정이지만, 동시에 지옥불처럼 잔혹한 고통이기도 하다. 어쩌면 사랑을 느끼는 것은 신을 경험하는 것과 같은 체험일지도 모른다. 독일의 한 철학자(신학자)는 인간이 신을 경험하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누미노제'라는 철학 용어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소름이 끼쳐 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과 같은 "전율하지 않을 수 없는 신비"이며 동시에 "마음을 끌어들이는 매혹적인 신비"라는 두 면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압도적 절대 타자(신)와 마주했을 때 경외감(공포)에 전율하지만, 동시에 매우 매혹적인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두렵지만 끌리는 마음. 그런 맥락에서 신은 사랑이 맞는 것 같다. 사랑 또한 두렵지만 끌리는 마음이니까.
<밤의 첼로>는 "멀쩡하던 한 인간의 삶이 치정으로 인해 얼마나 끝없이 추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여섯 편의 이야기이다. 음악은 잘 모르지만 <밤의 첼로>라는 제목을 힌트로 주관적인 감상을 적어보자면, 첫 번째 이야기 '밤의 첼로'는 주제부에 해당하고, 이어지는 4편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듯 닮은 4개의 변주곡이며, 마지막 여섯 번째 이야기는 그 4개 변주부가 하나로 합쳐져 다시 주제부를 형성하듯 읽힌다.
<밤의 첼로>는 사랑을 조롱한다. 오래된 농담처럼 새로울 것 없지만, 그 건조함 속에 광적이고 격렬한 불꽃이 튄다. <밤의 첼로>에서 연주되는 사랑은 혼돈이며, 환각이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상처의 집이며, 모순이다. 사랑은 변덕스럽다. 명식과 인경은 사랑했지만, 인경은 명식을 버렸고, 전신 근육의 대부분이 마비된 인경은 죽기 전에 명식을 한 번 보고 싶어 한다. 사랑은 혼란이다. 명식은 자신을 버렸던 옛 애인의 죽음 앞에 혼란스러워한다. 사랑은 상처의 집이다. 명식의 상처의 집은 인경의 죽음으로 다시 들쑤셔졌다. "이제 그녀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 명식을 "제 생애에서 가장 혹독한 밤 한가운데"로 몰아넣었고, 명식은 "인간의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에 첼로를 연주한다"는 신의 첼로 소리를 듣는다(밤의 첼로).
'밤의 첼로'에 이어지는 나머지 다섯 편의 이야기에서는 "사랑하지 않았다면 죽이지 않았을", 그러니까 사랑하기에 죽일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상대를 죽여버렸기 때문에 그 사랑을 끝낼 수가 없는 사람들이 각기 다른 이야기들 속에 서로 연결되어 등장한다. 치정 살인. "그 치정도 처음에는 아름다운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랑의 이중주가 죽음의 광시곡으로 변질되는가. <밤의 첼로>가 찾아낸 원인은 '변심'이다. "멀어지는 사랑을 분노 안에 가두려다가 살인까지" 저지르는 사람들. '물고기 그림자'의 은희는 사람이 정말 절망스러우면 미쳐 버린다고 말한다. 변심한 사랑에 절망하는 사람들이 미쳐버리면, 사랑은 폭력이 된다. "몽골에서 늑대는 숭배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사냥의 대상이기도 하다. 가죽도 가죽이려니와 가축들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이는 신에게 인간이 사랑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징벌의 대상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죄도 죄려니와 세계를 망치니 이런 치정 같은 모순에 매우 적합한 것이다"(버드나무군락지, 217).
<밤의 첼로>에서 연주되는 변주곡이 '버드나무군락지'라는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서로 연결될 때, 그 연결의 접점에 서 있는 두 인물이 있다. "이예훈"과 "권진규". 이예훈은 애인이 그의 둘도 없는 친구와 바람이 나 버림 당했지만, 체념했다. "나는 사랑을 잃고 고통 때문에 고지식해졌다. 깊은 병을 앓았고 값진 체념을 배웠으며 누가 뭐라든지 홀로 화가가 되었다"(버드나무군락지, 246). 체념을 배운 이 남자는 한쪽 눈을 도려내고 살아 남았다. 이런 맥락에서 권진규는 이예훈과 대칭점에 존재하는 듯한 인물이다. 우스운 농담처럼 던진 악마같은 한마디에 장해인이 스스로 목을 매 숨진 뒤, 그는 몸에 달라붙어 도망갈 수도 없는 진짜 지옥 불 속에서 산다. 휘청거리는 영혼, 그의 통곡소리마저 삼켜버리는 지옥불 속에서.
작가는 왜 마지막 이야기 속에서 "사랑했기 때문에 상처 입은" 사람들을 서로 연결지었을까. "문득 그는 사랑했기 때문에 상처 입은 어떤 이들과 자신이 아주 오래전부터 간절히 연결돼 있는 것만 같았다"(버드나무군락지, 250). 태연하게 지나는 사람들 속에 감추어진 사랑의 상처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일까. 누구가의 옛 사랑이 누군가에는 현재의 사랑이고, 누군가에게 버려진 사람이 누군가에는 짝사랑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사랑했기 때문에 상처 입은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가. 사랑에 상처 입은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면 자신의 상처를 객관화하고 상처로 연결된 사람들을 통해 치유를 경험할 수 있을까.
그런데 작가는 끝까지 사랑을 조롱한다. 잃어버린 사랑에 집착하는 고재만은 그의 옛 연인과 그녀의 새로운 연인을 찾아간다. 그녀의 새로운 연인인 목남은 시각장애인이지만, 은희에게 집착하는 재만의 고통을 본다.
"은희를 사랑하지 마세요.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을 하지 마세요."
(목남의 충고에 재만은 반격을 시도한다.)
".......네가 사랑을 알아?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지 알아?"
"당신의 두 눈을 내게 주십시오. 그럼 내가 당신 대신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된 그 여자를 증오해 드리겠소."
"......."
고재만은 완벽히 패배했다(버드나무군락지, 230-231).
<밤의 첼로>에서 나는 환멸을 보았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환멸이기도 하고, 사람에 대한 환멸이기도 하고, 신에 대한 환멸이기도 하다. "병운은 어떠한 법칙으로도 장담할 수 없는, 어떠한 진심으로도 설득할 수 없는, 어떠한 겸손으로도 평화로울 수 없는 이 세상이 끔찍했다"(40). 그런데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다면 환멸이라는 감정도 존재할 수가 없으니, 작가가 사랑을 조롱하는 것은 신 존재 증명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소설가 김원일 선생님은 "이 책은 시적인 문체와 모더니즘으로 불교의 연기론과 기독교의신학적 해석 안에서 슬픈 사랑을 이응준 특유의 관점으로 재해석한다"고 설명한다. 작가는 신과 씨름하듯 사랑의 환멸과 씨름한다. 그것은 오래된 주제이고, 더 이상 웃기지 않는 농담이지만, 내가 버리고 싶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은 신이 아니기에, 우리는 여전히 사랑이 주는 절망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