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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인데 어두운 방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그렇지만 유부녀라고 해서 뭘 느껴선 안 된다는 법은 없지 않나"(187)
한 번 짝을 맺으면 그 짝과 평생을 지낸다는 동물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감동한 인간은 그들의 습성(?)을 사랑이라 부르며, '고귀한'이라는 찬사를 아낌없이 선사합니다. (순전히 인간의 입장이지만) 한낱 미물도 그렇게 평생 제 짝에 대한 의리와 사랑을 지키며 사는데, "하물며" 인간이 짐승보다 못한 짓거리를 할 때 우리는 그것을 '불륜', '간통', '부도덕'이라는 말로 주홍글씨를 새깁니다. '고귀한' 동물들처럼 평생 한 사람의 짝만 사랑할 수 있는 본능(?)을 타고 나지도 못했으면서, 인간은 왜 한 사람의 배우자만을 사랑하겠다는 신성한(!) 약속을 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우리가, 아니 사회가 금기하는 일들에 의문을 제기하며 반역을 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한낮인데 어두운 방>도 그런 반역의 냄새가 다분합니다.
"떨려서는 안 될 상대"인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낮인데 어두운 방>의 이야기를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착실한 주부가 어느 날 마음에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한 한 외간 남자에게 빠져들다 결국 집까지 뛰쳐 나가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까지 듣고 순간 거부감을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잠깐 판단유보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저자가 <냉정과 열정 사이>의 에쿠니 가오리니까! 막상 소설책을 펼쳐 들면, "뭐야, 이런 이야기에 이렇게 설레여도 되는거야" 스스로도 의아할 만큼 콩닥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할 테니 말입니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며, "미국에 있는 아내와는 이미 15년 넘게 별거 상태"에 있는 존스 씨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중년의 신사(!)입니다. 배우자가 아니어도, 꼭 사랑하는 감정이 아니어도 여자와의 잠자리에 거칠 것이 없지만, 여기에는 '상대가 원할 때'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이고, 배려입니다. 미야코 씨는 수다를 떨 때조차 손에서 일감을 놓지 않는 착실하고 부지런한 주부입니다. 아직 아이는 없지만 남편 히로시 씨와 함께 사는 자신만의 공간(집)에서 나름대로의 행복을 가꾸어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지만 그녀에는 활기가 넘칩니다. 존스 씨에게 미야코 씨는 새장 안에서 종종 거리며 아름다운 노래를 하는 작은 새처럼 귀엽습니다.
존스 씨와 미야코 씨가 가까워지고, 점점 상대방에게 빠져드는 것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아슬아슬 위태위태 하면서도 어쩐지 이 두 사람을 응원하게 됩니다. 미야코 씨는 "원래"(!) 착실한 주부였다는 것, 존스 씨를 향해 가슴이 콩닥거리기까지 그들의 만남에는 어떠한 불손한(?) 의도도 없었다는 것, 계속해서 남편에게 손을 내밀지만 남편 히로시 씨는 무심하기 그지 없었다는 것, 이 모든 이유들이 남편이 아닌 남자에게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하는 이 여자를 변호하게 만듭니다. 남편이라는 사람은, 어찌나 무심한지 이 남자는 이 여자에게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자격이 없어 보일 지경입니다.
미야코 씨는 '필드 워크'라는 이름으로 존스 씨의 손에 이끌려 "집 밖으로" 나오기 시작합니다. 익숙한 동네이고 잘 안다고 생각했던 거리인데도, 존스 씨와 함께 마주한 세상은 미야코 씨에게 "모든 것이 낯설고, 신선하고, 무섭도록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보입니다. 미야코 씨는 "아주 잠깐 밖에 나가는 것이 이토록 즐거운 일이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존스 씨와 함께 있으면, 하루하루가 새롭다는 것,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색이 넘치고 소리가 넘치고 냄새가 넘쳐난다는 것, 모든 것이 변화하며 모든 순간이 유일무이하다는 것, 하지만 그렇다고 애석해할 필요는 없다는 것, 따위가 무섭도록 선명하고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존스 씨와 함께 있으면 그런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 하나하나가 갑자기 특별해집니다." 그 새로운 경험과 흥분 속에서 미야코 씨가 이제까지 발 디디고 있던 "확고한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기존의 가치관이 무너져" 버립니다.
이야기의 결말은 모두가 예상했던 것일 수도 있고, 뜻밖일 수도 있겠습니다. 미야코 씨와 존스 씨의 사랑이 어떻게 결말 지어지든, 미야코 씨는 이미 발칙한 도발을 선택했습니다. 임자 있는 여자(유부녀)니까, 그 임자 외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몸이니까,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본디 사랑이라는 '감정'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던가요. 그 흔들림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지, 그것이 점점 개인의 '선택'의 문제가 된다는 것이 의미심장할 뿐이지요. (주인공이 유부녀라는 점에서 더욱) 미야코 씨의 선택을 해방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은 성적인 해방이라기보다, (진정한 사랑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포함한다 하더라도) '한 사람과의 영원한, 적어도 평생 사랑' 아닌가요? (제가 아직도 갇혀 있는 것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