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소년 1
이정명 지음 / 열림원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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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 태어났으나 자신의 천국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소년

 

 

<뿌리 깊은 나무>와 <바람의 화원>을 드라마로 시청했거나 원작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신간이 나왔다. <뿌리 깊은 나무>가 드라마로 제작되기 전, 입소문을 듣고 도서관엘 몇 번 갔었는데 찾을 때마다 장기간 계속 "대출" 중이었고 대기자가 줄을 서 있었다. (호불호의 간극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 해도) 독자들의 입소문만큼 신뢰할 만한, 그리고 정확한 판단도 드물 것이다. (그의 책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독자들이 이정명 작가에게 열광하는 것은 '계속 궁금하게 만드는' 그만의 탁월한 이야기 방식에 매료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2권으로 출간된 <천국의 소년>도 '의문'에서 시작된다. 뉴욕에서 일어난 한밤의 살인 사건과 살인현장에 남겨진 세 개의 수수께끼. 50대 남성이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된다.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된 50대 남성이 2년 전 망명한 북한 출신으로 밝혀지고, 현장에서 검거된 20대 초반의 남성이 용의자로 지목된 가운데 그가 인터폴 적색수배령이 떨어진 국제 범죄자로 밝혀지면서 사건은 심각성을 더한다. CIA는 곧 "핵 관련 정보 누설을 우려한 북한 당국의 테러 행위일 가능성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다.

 

심문이 시작되면서, 용의자는 곧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라는 것이 밝혀진다. 자폐증과 비슷하지만 언어 발달에는 문제가 없는, "사회적 관계와 대인관계에 어려움이 있고 행동이나 관심 분야, 활동 분야가 한정되며 같은 양상을 반복하는 질환", "머리가 모자란 것도 아니고 언어 발달에도 문제가 없"지만, "현학적이거나 우회적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의사 소통에는 어려움이 있"는. 그래서 협박도 통하지 않고 심문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남자! 그런데 그의 배낭에서 쏟아져 나온 아홉 장의 위조여권과 아홉 개의 이름, "도대체 너란 놈은 누구인가?" 20대 초반의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가 어떻게 살인, 사기도박, 마약 거래 등의 사건과 연루되어 인터폴 수배자가 되고 살인범이 되고 테러리스트가 되었는가. CIA 요원의 심문대신, 병감담당 간호사 안젤라 스토우와의 인터뷰가 시작된다.

 

 

이 책의 제목은 <천국의 소년>이다.  천국에서 '온' 소년도 아니고, 천국으로 '간' 소년도 아니고, 그는 <천국의 소년>이다. 나는 목차를 보고 제목에 함축된 의미가 "자신의 천국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소년"이라 해석했다. 하나님이 7일 동안 '세계'를 창조하신 것처럼, 주인공의 이야기는 총 7일 간 계속된다. '길모'(평양에서의 그의 이름)의 이야기는 첫 번째 날 평양에서 시작되어, 평양에서 수용소로, 수용소에서 국경(두만강)으로, 두만강에서 연길로, 연길에서 상하이(여기까지가 1권)로 옮겨진다.

 

사람들이 바보라고 부르는 아이, 타인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지도 못하는 아이, 감정을 다루는 능력이 없는 아이,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공포도 인식하지 못하는 이 아이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특별한 아이"이다. '길모'는 "머릿속에 돌아다니는 숫자와 수식들과 노는" 수학 천재이다. 그의 특별한 재능을 알아본 사람들은 그때마다 그를 자신들의 게임에 끌어들인다. 그의 특별한 재능을 알아본 '당'은 그를 수학 올림피아드에 내보기 위해 영재 교육을 실시하고, 수용소의 부패 관리는 그에게 장부를 맡기는 식이다.

 

수많은 사람이 이 수학 천재를 자신들의 게임에 끌여들였지만, 길모가 선택하고 집중한 게임은 단 하나 뿐이다. 수용소에서 '영애' 아버지가 던져준 게임. "우리가 이런 곳에 있지만 게임이 끝난 건 아니야. 게임은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지. 어쩌면 죽고 난 다음에도 쭉...... 언젠가 우린 이곳을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게다. 누군가는 죽어서, 누군가는 살아서...... 난 이곳에서 죽을지 모르지만 내 딸은 살아서 이곳을 나가야 해. 그럼 네가 그 아이를 보살펴줄 수 있겠니?"(134)

 

아저씨는 "누군가를 보살핀다는 건 언제까지나 그 뒤를 따르며 지켜봐주는 거"라고 설명한다. 길모는 영애를 '보살펴주기' 결심한다. 영애의 뒤를 따르며 길모는 "푸엥카레의 추측"을 생각한다. "지구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든 긴 끈이 있으면 우리는 우주로 나가 직접 보지 않고도 지구의 모양을 알 수 있다. 긴 끈의 한 끝을 지구의 한 점에 고정시키고 다른 한 끝을 잡고 지구를 돌아 출발한 곳으로 돌아오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기다란 끈의 양 끝을 고삐처럼 쥘 수 있다. 그 뜬을 끌여당겨 지구 표면을 따라 모두 회수하면 지구는 둥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72). 영애가 수용소를 나간 후, 길모의 삶은 영애와 이어진 긴 끈을 따라가는 여행이 된다. "그녀는 지구상의 한 점에서 나를 떠났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긴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거미줄처럼 가늘고 반짝이지만 끊어지지 않는 끈. 나는 그 끈을 따라 여행을 시작했다"(173).

 

 

<천국의 소년> 길모는 영애의 자취를 따라 도시에 도시로 옮겨가며 '세상'을 경험한다. 나는 그가 '지옥'을 봤고, 지옥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길모가 처음 경험한 지옥은 배고픔의 지옥이었다. "거리와 장마당을 헤매며 쓰레기통을 뒤지는 아이들. 상한 음식을 주워 먹거나 풀을 뜯어 먹고 구걸을 하거나 음식물을 훔치는 아이들. 수많은 위험 속에 살지만 위험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배고픔 때문에 독풀을 뜯어 먹다 죽고 도둑질을 하다 맞아 죽는 아이들"(182-183). 사람들은 이 아이들을 "꽃제비"라 부른다. (이 책에서 처음 알았는데) "꽃제비"를 뜻하는 "꼬체비예"는 러시아어로 유랑, 유목, 떠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183).

 

지옥에서 탈출하면 천국에 다닿을 수 있을까. 지옥을 탈출하려고 끊임없이 발버둥치는 영애,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길모가 새롭게 마주하는 '도시'는 또다른 지옥이었을 뿐이다. '죽음배달부'(장의사)였던 아버지, 배고픔의 지옥 수용소, 꽃제비를 삼키는 죽음의 강(두만강), 몇 줌 안 되는 "딸러"를 사랑하는 뒷골목(연길), 돈(자본주의)의 지옥 상하이. (2권으로 이어지는 마카오, 서울, 멕시코, 뉴욕도 마찬가지이다.)

 

날치가 길모에게 물었다. "꽃처럼 아름답지도 않고 새처럼 자유롭지도 않은데 왜 우릴 꽃제비라 부를까?" 길모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꽃처럼 연약하고 새처럼 온순하니까"(183). 꽃처럼 연약하고 새처럼 온순한, 가진 재주라고는 천재적인 수학 능력밖에 없는 이 아이는 세상으로부터 영애를 지켜주기로 한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천국의 소년>은 지옥에서 탈출하는 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거니까.

 

"길모야. 넌 착한 아이야. 강한 사람은 자신을 지킬 수는 있지만 누군가를 지켜주지는 않아. 하지만 착한 사람은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지켜줄 수 있지"(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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