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루스트라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9
미겔 시후코 지음, 이광일 옮김 / 들녘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아빠, 정치가 뭐예요?"

 

"그러니까, 그게 말이야,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 우선, 나는 집안의 우두머리야. 그러니까 나는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겠지. 엄마는 규칙을 정해. 그러니까 엄마는 행정부야. 우리는 너희를 돌봐주지. 그러니까 너는 국민이라고 할 수 있어. 인데이 아줌마는 우리를 위해서 일해. 그래서 우리는 아줌마한테 월급을 주지. 그러니까 아줌마는 노동계급이라고 할 수 있어. 남동생은 미래라고 해두자. 이제 잘 생각해 봐. 정치가 어떤 건지."

 

걸리는 잠자리에 들어 아빠한테 들은 얘기를 곰곰 생각한다. 한밤중에 걸리는 잠에서 깬다. 남동생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살펴보니 기저귀에 똥을 한 바가지 싸놓았다. 걸리는 엄마, 아빠 방으로 간다. 그러나 엄마는 비몽사몽이다. 매일 밤 수면제를 먹기 때문에 깨워도 소용이 없다. 걸리는 아줌마 방으로 간다. 그러나 문이 잠겨 있다.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니 아빠가 인데이 아줌마랑 침대에 누워 있다. 걸리는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간다.

 

"아빠, 정치가 뭔지 이제 알 것 같아요. 그러니까 대통령은 실제로는 노동계급하고 이상한 짓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정부는 자고 또 자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안 해요. 국민한테 관심을 쏟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리고 미래는, 그러니까, 미래는 똥덩어리를 뭉개고 있어요."

 

보이 바스토스는 흐뭇한 마음에 딸의 머리에 뽀뽀를 해준다. 마침내 걸리도 다 컸다(522-524).

<일루스트라도>는 한 필리핀 작가의 부음기사로 시작된다. 책을 다 읽고 그 부음기사를 다시 보니 "의미심장"하기 그지 없다. "크리스핀 살바도르"가 "느닷없이" 인생을 끝맺게 된 것에는 여러 미스테리가 존재한다. 그의 시신은 왜 뉴욕 허드슨 강을 떠다니고 있었을까? 그의 죽음은 자살인가, 타살인가? "필리핀 엘리트층이 여러 세대에 걸쳐 어떻게 끈끈한 인맥으로 연결되고, 불법 벌목을 일삼았으며, 도박과 납치, 부패 및 그와 얽히고설킨 범죄를 저질렀는지 낱낱이 까발리"겠다고 장담했던 그의 원고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가 정말 죽은 것은 맞는가?

 

제자 미겔 시후코(그는 이 책의 저자와 이름이 같다)는 스승의 죽음에 얽힌 의문을 풀어내기 위해 마닐라로 향한다. 미셀 사후코가 쓰는 전기를 통해 크리스핀의 인생이 복원되기 시작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화자는 미겔 시후코지만, <일루스트라도>는 스승의 궤적을 쫓는 미겔 시점의 이야기, 크리스핀 시점의 이야기, 소설 속의 소설, 인터뷰 등이 퍼즐 조각처럼 교차한다. 각각의 퍼즐이 제자리를 찾아야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것처럼, 이야기 조각들이 하나씩 더해갈수록 크리스핀의 개인사를 감싸고 있는 필리핀의 거대한 근현대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스페인 사람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는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시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다시 "백인의 아시아 지배를 종식해야 한다" 명분 아래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운 일본의 점령까지 무려 400년 간이나 외세의 통치 아래 있었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부정과 부패로 얽룩진 사회. 몇 년 전, 필리핀을 가볼 기회가 있었는데 골곡의 역사를 말해주듯 식민지의 흔적이 곳곳에 가득했던 기억이 난다. 가톨릭 문화를 보여주는 건축물들, 미군의 주거지였다가 필리핀 상류층의 주거지가 된 타운, 타칼로그어보다 영어를 더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한 때는 아시아의 진주로 불렸던 사람들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이들이 가지고 살아가는 정체성은 어떤 것일까 궁금했던 적이 있다.

 

<일루스트라도>는 그 필리핀의 후예가 "우리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무엇을 했는가?" 묻고 있는 듯하다. 독립을 꿈꾸지 않았는가? 변화의 가능성은? 개혁의 의지는? 어떻게 그 오랜 세월 그렇게 어치구니 없는 역사를 써내려올 수밖에 없었는지 되묻는 듯한 소설로 읽힌다.

 

<일루스트라도>는 한 개인의 가족사를 통해 필리핀의 근현대사를 복원하며, 아이를 갖는다는 것의 의미, 그 아이를 교육 시키는 문제에 "유난히" 집착하고 집중한다. "아이를 갖는다는 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낙관의 제스처"로 받아들인다(230). 그래서 "우리의 가장 큰 숙명은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다. <일루스트라도>를 보면, 필리핀의 많은 부모 세대가, 엘리트층일수록 자녀의 교육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이를 타국으로 보내 "일류" 교육을 시키려고 달러를 쳐들인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그들이 얻으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부정과 부패로 얻은 권력과 유산을 대물림하는 것?

 

그러면 그런 사람들 속에 이상을 꿈꾸고, 사회를 변화시켜 보겠다는 사람은 없었는가? 이런 물음에 대해 한 아버지는 이런 고백을 한다. "젊은 우리는 이상에 불탔다. 새벽이 밝아온다. 불쌍한 마리아 클라라는 내가 피곤해 하는 게 우울증 때문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이상에 불타는 젊은이었던 '아버지'를 나약하게 만든 것은 어쩌면 '아들'(자녀) 자신이기도 하다. "애들은 나의 자부심이다! 아침에 애들이 좋다고 달려들면 조국이 어쩌고 하는 거창한 생각들이 싹 가신다. (...) 우리가 떠드는 이념이며 변화의 가능성, 우리의 인내심 같은 것들은 우리가 내뿜는 담배연기처럼 뿌옇다. 그런 얘기들이 다시금 내 머리에 불을 댕기고 또 잠 못 이루는 밤이 다가온다. 지긋지긋한 과정이 반복되고 다시 아침이 온다"(190).

 

비극의 역사를 보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서 잘못한 일들은 뒤집고, 잘한 일들은 더 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534).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시간은 역류할 수 없는 것이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이 말이 참 뼈아프다. 왜 그런 역사를 써왔느냐고, 왜 사회를 이렇게 만들었냐고 지난 세대에게, 기성세대들에게 따지고, 질타를 하지만, 우리에게도 그것을 바꿀 기회가 있었다는 것. "다만 이제 무대에서 내려왔을 뿐"(534)이라는 것. 우리처럼 우리의 아이들도 우리의 실수를 되풀이 할 것이라는 것. 필리핀의 식민지 역사, 부정과 부패로 얽룩진 근현대사는 그렇게 되풀이 되어 왔다.

 

<일루스트라도>는 지난 역사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며, 이제는 "다른 사람의 그림자 속에 끼어서 살지 않겠다"고, "성공하든 실패하든 최소한 자신이 믿는 삶을 살겠다"고, "우리의 존엄을 지키자"고 노래하는 이야기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혁명은 "단순히 부모를 죽이는 정도가 아니란 걸" 깨닫는다(258). 이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간다."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나 돌아간다. 내 자식한테로 돌아간다. 그 딸내미가 이제는 준비가 되었을 터이므로"(553). "그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최소한 어떤 시도를 할 의지는 있다는 증명이다"(526).

 

 

<일루스토라도> 안에는 크리스핀의 <자신을 표절한 자>라는 작품이 등장한다. (내가 제대로 읽은 것이 맞다면) <자신을 표절한 자>라는 컨셉이 이 책을 뒤덮고 있다. "에필로그"에 보면, 미겔이 크리스핀을 표절하고, 크리스핀이 미겔을 표절하고, 필리핀의 역사를 보면 '아버지'의 역사를 아들이 다시 표절하고, 그 인생을 다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환각이 일어난다. 거기에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그에게 일어난 일을 끊임없이 골똘히 생각했다"(549). 필리핀에 일어난 일을 끊임없이 골똘이 생각하다 보면,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한 가지 기대가 이 책을 읽어야 할 하나의 의미로 다가온다. 

 

"언젠가 노벨문학상 심사위원회를 고민하게 만들 작가"라는 미겔 시후코의 <일루스트라도>는 (애석하게도) 잘 읽히지 않는다. 너무 잘게 쪼개진 퍼즐 조각들, 눈치 빠르지 않으면 알아채기 쉽지 않은 중첩의 의미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전개 등, 작가는 저만치 성큼성큼 뛰어가는 데 독자는 좇아가기 버거운 소설이라고나 할까. (미겔 시후코를 보니 인도를 보여주었던 로힌턴 미스트리가 연상되는데, 로힌턴 미스트리의 작품이 훨씬 재미있게 잘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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