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란 무엇인가
크리스토퍼 베넷 지음, 김민국 옮김 / 지와사랑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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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가장 자신 있고 쉬웠던 과목 중의 하나가 '도덕'(또는 윤리) 과목이었습니다.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좀 더 어려워지기는 했지만) 답이 뻔히 보이는 문제들이었기 때문에 따로 공부할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 가장 어려운 문제가 바로 윤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수학은 오히려 명확한 정답이 있는 문제이고 수학자들도 풀기 어려운 문제는 실생활에서 사용할 일도 없으며, 영어는 정확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면 문법은 좀 틀려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윤리는 다릅니다. 학교 다닐 때 우리가 배웠던 도덕은 "이렇게 이렇게 해야 마땅하다"는 당위가 많았습니다. 시험을 치루었던 도덕 문제는 착하다고 생각되는 행동, 정직한 행동, 사회규범(약속)을 지키는 행동을 선택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살면서 부딪히는 윤리 문제는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윤리 문제는 종종 우리를 딜레마에 빠뜨립니다. 몇 년 째 뇌사 상태로 기계에 의존해 연명하고 있는 노부모의 안락사 문제, 심각한 장애가 발견된 태아의 낙태 문제, 동성애자의 인권은 보호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성애자 인권 문제가 이슈화 될수록 그것을 학습하는 청소년들과 무분별한 흉내내기가 유행을 하는 사회 현상, 사형제도, 인간복제 등 수많은 문제가 우리를 선택의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윤리란 무엇인가>를 읽기 전까지 이런 도덕적 딜레마, 윤리의 문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공적인 차원의 문제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윤리란 무엇인가>는 윤리 문제가 "개인적 차원"의 문제라고 정의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누군가 대신 생각해줄 수 없다는 의미"에서 윤리적인 사고는 "개인적인 일"이라고 설명합니다(12). 이러한 정의 안에는, 옳은 행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단순히 복제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윤리가 전적으로 개인적인 문제만은 아닙니다. 윤리는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문제임과 동시에 옳은 답을 얻고자 노력하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윤리는 개인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려는 고민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견해를 남들 앞에서 정당화하거나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왜 내가 그런 방식으로 행동했는지 끊임없이 묻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윤리학은 어떤 행위가 남들이 하나하나 따져보더라도 진실로 변호할 만한 행위인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17). 그러니까 윤리적 문제는 누군가가 "마땅히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당위"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땅히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누군가의 답에 "정말 그러한가" 의문을 제기하고, 옳은 답을 찾기 위해 스스로 열심히 고민하고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윤리란 무엇인가>의 저자는 철학자입니다. 다시 말해, 철학자가 쓴 윤리학 입문서라 할 수 있습니다. 철학적 사고로 주요 도덕이론의 관점을 검토하며 윤리적 문제에 대한 접근과 비평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풀어갑니다. 죽음과 삶의 문제에서 시작되는 저자의 논의는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문제(정답)에 대해 의문을 갖도록 이끌어가고, 주요 도덕이론의 논점을 짚어주며, 우리가 생각해야(풀어내야) 할 윤리적 과제가 무엇인지 던져줍니다. 예를 들면, "죽음이 꼭 나쁜 것일까?"와 같은 질문을 풀어가는 과정 속에서 독자는 도덕이론의 주요한 골자와 비평에 흥미롭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각 장마다 '토의사항'과 '더 읽을 책'을 제시하고 있어 학부 교양과목의 교재로 사용해도 좋을 듯합니다.

 

"왜 우리는 도덕적으로 행동해야만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는 "신(종교)은 존재하는가"라는 인류의 오랜, 그리고 끝나지 않는 질문과 닿아 있습니다. 유신론자들이나 허무주의자는 신이 없다면 아무런 목적도, 가치도, 도덕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249).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한 도덕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물질세계 자체는 의미나 가치가 없는 텅 빈 세상이다"(245). "오로지 과학만이 세상 지식의 원천이라면 옳은 행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희박해질 것이다"(246). 그러나 인본주의자는 "유신론자와 무도덕주의자들이 도덕에 관한 인간의 사고능력을 과소평가한다고 결론짓"습니다(267). 인류가 인간 지식이 발달할수록 오히려 옳은 행동의 딜레마에 빠져드는 것은 절대 진리(신의 계시)를 부정하고 인간의 이성에 의존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으면서 동시에 절대 진리를 부정하게 되니 모든 것이 상대적으로 변하고 맙니다. 누군에는 옳은 행동이 누구에게는 나쁜 행동이 될 수 있고, 여기에서는 나쁜 행동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옳은 행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 이성과 지식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더욱 불확실과 혼란에 빠져드는 형국입니다. 그래서 윤리의 문제가 우리에게 더 절실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윤리란 무엇인가>는 철학과 윤리학을 동시에 읽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 책에 정답이나 주장은 없습니다. 여러 주장과 그에 대한 비평을 소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논점이 무엇인지,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무엇에 대답해야 하는지 골격을 잘 가르쳐줍니다.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철학적 사고에 젖어드는 기분이 듭니다. 제목은 묵직하지만, 누구나 관심 있게 읽어볼만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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