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철학으로 읽기 - 예술의 형이상학적 해명
조중걸 지음 / 한권의책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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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그만큼 현실에 묶인 것이다"(298).

 

 

이 책은 "형이상학적 해명에 입각한 미술사를 소개해보려는 노력의 결실"이라고 합니다. "형이상학적 해명에 입각한 미술사"의 다른 표현이 바로 이 책의 제목 <서양미술사 철학으로 읽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형이상학적 해명이 없는 예술사는 도상학이나 도상학적 연대기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어째서일까요?

 

이것은 "모든 문화 구조물이 동시대의 세계관에 묶인다"는 저자의 주장을 반영합니다. "어떤 심리적이거나 학구적인 업적도 동시대의 세계관에서 자유롭지 않다. 오히려 그것들은 동시대 이념의 선구이거나 반영이다"(9). 어떠한 예술도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서양미술사 철학으로 읽기>는 저자의 이러한 논지를 증명하는 탐구과정입니다. 특히 이 책에서는 "예술사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어왔던 구석기, 신석기, 로마, 고딕 등의 양식에 좀 더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고 밝힙니다. 또한 "고딕의 전개와 함께했던 인식론상의 유명론"을 가장 비중 있는 부분으로 상술한 것이 이 책의 특징입니다(11).

 

 

"예술적 표현은 기술상의 문제라기보다는 세계관과 이념의 문제이다"(20).

 

(이 책을 제대로 읽은 것이 맞다면) 서양미술사에 반영되어 있는 인류의 세계관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하나는 "이해될 수 있는 우주"라는 세계관이고, 이와 대척점에 있는 또다른 세계관은 "낯설고 대답 없는 우주"라는 세계관입니다. 이 두 개의 세계관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때로는 "혁명"이라고 할만큼 커다란 변화의 바람이 불기도 하고, 이후와 이전의 단절을 불러오기도 하고, '재탄생'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저자의 이러한 논지는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미술에서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알타미라와 라스코 동굴 벽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겨놓은 구석기인들의 세계관은 다분히 자신만만하고 의연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구석기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기술적 역량과는 현저히 대비되는 과학적 자신감"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신석기 회화에는 구석기 동굴벽화에 풍부하게 존재했던 화려한 색채와 박진적인 자연주의적 기법이 더 이상 드러나지 않"(29)습니다. 신석기시대의 예술은 "우리가 보는 대로의 세계, 다시 말하면 시각적 충실성을 따르는 양식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시각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사물을 기학적으로 배치하는 양식"이며, "이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발생하는 형식주의의 예술"(29)입니다. 저자는 구석기시대의 회화와 신석기시대의 회화 사이에 거대한 단절을 보며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어떤한 세계관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박진감 넘치고 자신만만하며 아름다운 동굴벽화를 가능하게 하였을까? 그리고 신석기시대인들은 새로운 기술적 진보와 더불어 왜 추상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예술을 택했을까?"(20-21)

 

이에 대한 답은 한마디로 "세계관의 변화"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해되는 바로의 세계'라는 세계관은 가차 없는 유물론적 진행 과정을 밟으며 우리의 과학이성에 대한 신뢰를 싹트게 하고 세속적 세계관을 구축한다. 신석기시대의 기하학적 양식은 이러한 세계관이 붕괴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31).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통찰입니다. "이해할 수 있는 우주"라는 세계관, 다시 말해 "이해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세계에 대한 신념"은 "언제나 자연주의적이고 사실적이며 환각적인 예술을 낳는다는 가설"(27)입니다. "이해될 수 있는 우주"라는 세계관이 뒷받침될 때에는 자연주의적 예술이 융성하고. "낯설고 대답 없는 우주"라는 세계관이 대두될 때에는 기하학적인 양식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기법이 새로운 양식을 탄생시키기보다는 새로운 세계관에 따라서 새로운 양식의 예술의욕이 생겨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31).

 

"이해할 수 있는 우주"라는 세계관은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하는 자신감, "과학기술과 지식을 바탕으로 세계를 이용할 수 있다고 믿는 세계관"입니다. 세계는 그들이 발견해낸 자연법에 입각하여 운행되고, "우리 본연의 지적이고 심리적인 역량과 노력에 따라 인식 가능하며 통제 가능한 세계"가 됩니다. 이러한 신념에서 자연주의적 회화가 탄생합니다. 그리스인들의 인간 이성의 역량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이나 고전주의 역시 구석기사대의 자연주의적 예술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유명론은 이러한 자신감에 대한 전면적인 의문에서 출발한다. 유명론은 인간에게 실체란 단지 유사성에 기초한 집합명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써, 결국 실재에 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식에 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이념에 대한 예술적 대응이 고딕이다"(82).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어떨까요? "현대를 가장 크게 특징짓는 무의식적인 징조는 무의미와 절망"(293)입니다. "현대 예술 역시 감각에 대한 혐오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신석기시대의 세계관을 공유"(295)합니다. "현대 예술의 근거는 '버림받았다'는 실존적 문제로부터 비롯되는 실향의 감정이다. 다시 말하면 현대의 관념적 예술은 세계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는 절망과 무능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세계 속으로 도피해버리는 나르시시즘이다"(301-302).

 

 

철학으로 읽는 서양미술사는 한마디로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의 이행처럼, "근세부터 현대에 걸쳐 자연주의에서 기하학주의로 이행해온 역사"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두 계의 세계관이 충돌할 때, "관념에 의해 세계를 구성하기를 원하고, 삶을 수학적 지성 속에 고정시키기를 원하고, 해체를 거부하고 전문가를 경멸하며 전인적 인간상을 지향하는 것은 언제나 기득권자들이다"(256)라는 통찰도 흥미롭습니다.

 

이 모든 흥미로운 통찰에도 불구하고, <서양미술사 철학으로 읽기>는 불친절한 책입니다. 취미나 교양으로 읽기에는 철학적 개념과 미술사적 용어들이 장벽처럼 등장합니다. 저자 역시도 "문화에 대한 철학적 해명은 결국 어떤 국면에서의 난해함을 피할 수 없다"고 좌절합니다. 녹록지는 않지만, 세계관에 입각하여 굵직한 미술사를 호탕하게 읽어내는 배움의 재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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