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 개정판
이도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을 두 번 읽는 일이 없는 내가, 이 책을 두 번 읽었다. 영화 <사랑과 영혼>을 보고나서, 어디서라도 'unchained melody'가 들려오면 나는 한동안 자동정지가 되었다. 길을 걷다가도 가던 길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노래가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이 전면 개정되어 다시 나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 책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이건'의 시집처럼, 자꾸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린다, 이 책이.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은 사랑 노래, 사랑 이야기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10년째 읽히고 있는 연애소설이다. 2004년에 초판되어 2007년, 2013년 두 번이나 옷을 갈아입고 다시 독자를 찾아왔다. 서서히 사랑이 지겨워질 법도 한 30대 초중반, 그 나이에 새로 시작되는 사랑 이야기가 계속해서 독자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슨 조화인지 갑자기 가슴이 두근, 했다"(48).

 

9년 차 라디오 작가 공진솔은 새로이 함께 일하게 된 이건 피디를 볼 때마다 어느 순간 자꾸 가슴이 두근, 거린다. 우연히 만난 수영장에서, 또 방송국 직원들과 함께 간 야유회에서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다. 서서히 붉은 노을에 물들어가는 하늘처럼, 어색하고 낯설기만 한 그였지만, 그와 함께 일하고,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이 진솔의 마음과 일상은 어느새 그 남자로 물들어간다.

 

건의 짓궃은 웃음이 진솔은 좋았다. 때로는 심술부리듯, 때로는 부드럽고 따스하게 말하는 그가, 무심한 척 잘난 척도 하지만 선한 느낌을 주는 그가 사랑스러웠다. 불현듯 그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랑...스러워?(134)

자신의 감정이 당혹스러웠지만, 진솔은 자꾸만 건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그래서 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진솔 씨는, 나한테 일기장 같은 사람이에요"(160).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할 때 나타나는 두 가지 증상을 나는 알고 있다. 하나는 그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초조한 마음과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생기는지 자꾸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싶어지는 충동이다. 진솔도 이건의 마음이 궁금했다. 자꾸만 자신의 삶을 파고드는 이 남자의 마음이 궁금할 즈음, 진솔은 이건 때문에 심장이 따끔거리기 시작한다.

 

그 후로 애리는 선우 앞에선 안 울어요. 나한테 와서 울지."

그래. 차라리 울고 싶은 마음이란 이런 걸까?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이 아려서 견디기가 힘들었다(158).

진솔의 마음에는 새로운 사랑이 싹트고 있었는데, 이건의 마음은 사랑에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이건의 오랜 친구인 선우와 애리. 진솔은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사이 이건의 마음이 애리를 향해 있다는 것을 눈치 챈다. 이건은 진솔이 자신에게 일기장 같은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진솔은 그것이 이건이 긋는 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미련을 거두지 못한다.

 

일방통행이라고 해도 한번 시작된 사랑은 쉽게 멈출 수 없는 법이다. 아픈 마음도 사랑이니까. 늦은 밤, 불쑥 찾아와 자신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이 남자, 자료를 핑계로 자신의 집에 데려가 가족을 소개하는 이 남자, 그의 다정한 문자만 봐도 조용히 미소가 번지게 만드는 이 남자에게 진솔은 사랑을 고백하고 만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불쑥 찾아오는 사랑처럼, 예기치 못한 순간에 불쑥 고백하고 만 사랑이었지만, 진솔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그를 기다려보기로 한다.

 

 

  

 

"갑자기 당신이 문 앞에 서 있었어요. 그럴 땐, 미치겠어. 꼭 사랑이 전부 같잖아"(408).

 

모든 사랑이 무사할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사랑이라고 확신하고, 무엇이 사랑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까.  

여자는 "나 아니면 안 되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면, 그저 편해서 좋은 거라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게 오래 들여다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감정이라면, 번번이 그 사람이 아플 때마다 당신 마음도 같이 아파서 미치겠는 거라면... 그건 아니거든요... 나 아니면 안 되는 꼭 내가 필요한, 그런 절박한 감정은 아니거든요(318).

마음에서 지워야 하는 사람이 있어 빨리 달려가지 못했지만, 남자는 상처받기 싫어서 물러나겠다고 하는 여자에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난 정말 당신이 날 사랑하는 줄 알았죠. 이 정도 선에서 상처받기 싫어 물러나겠다고 한다면 사랑했다고 말하는 것도 엉터리야. 그 만한 자격이 있는 감정이 아니에요, 당신 그 마음은(333).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내리 읽어버렸다.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자주 책장을 덮고 멈추었다. 울렁이는 가슴이 뻐근했기 때문이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은 두근거리지만 현실성은 없는 드라마처럼 오글거리게 로맨틱하지도, 유별나게 달달하지도 않다. 내 옆의 누군가의 이야기이면서 또 나의 이야기이기도 싶게 자연스럽고, 또 사랑이란 것이 이런 맛이었지 싶게 전형적이지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더 마음이 풍덩 빠져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은 무엇보다 문장이 예쁘다. 문장의 리듬이 부드럽게 마음을 건드린다.

 

학창시절, 친구들과 돌려가며 <하이딘 로맨스> 시리즈를 책상 밑에 숨겨 두고 읽는 일에 몰두한 적이 있다. 이야기의 패턴은 대부분 비슷했다. 서로 사랑하게 되는 여자와 남자가 있고, 서로의 마음을 숨긴 채 갈등하며 애를 태우다, 마지막 다섯 장쯤 남겨두고 남자와 여자는 극적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달콤한 사랑에 빠져든다. 그때는 그런 뻔한 사랑 싸움에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뻔한 줄다리기가 곧 사랑이라 여겼으니까. 그러나 정작 사랑 앞에 서니 가장 두려우면서도 또 귀찮은 것이 바로 그 "뻔한 사랑 싸움"이었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은 밀어내기도 하고 당기기도 하는 그 뻔한 사랑의 줄다리기가 싸움이 아니라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새삼 상기시킨다. 미소가 만국공통어라고 하는데, 사랑 공식도 만국이 공통인 것 같다. 시대와 나이를 불문하고 말이다. 심장이 먼저 사랑을 알아보고 두근거리기 시작하면 그의 마음에도 내가 있나 궁금해지고, 그의 사소한 몸짓 하나에도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면 그가 다른 사람(이성)에게 보내는 의미 없는 웃음에도 괜히 토라져버리고, 서로 사랑한다 싶어 행복했다가도 아니다 싶으면 모든 것을 끝장내버릴 듯이 사랑을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혼자서 사랑을 끝냈다가 다시 시작했다가를 수없이 반복하는, 사랑의 열병. 어느 순간 설레이는 것도 귀찮고, 유효기간 뻔한 사랑에 목숨 걸일 있나 싶어 심드렁해진지 오래인데, 미치겠다. 누군가를 향해 다시 한 번 심장이 두근, 뛰어주기를, 나도 모르게 기도하게 된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에서 내가 꼽는 최고의 명대사는 백발이 성성한 (이건의) 할아버지가 사랑앓이를 하는 청춘(진솔)에게 들려주는 따뜻한 한마디이다. 

  

사람은 말이디... 제 나이 서른을 넘으면, 고쳐서 쓸 수가 없는 거이다. 고쳐지디 않아요."

진솔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보태서 써야 한다. 내래, 저 사람을 보태서 쓴다... 이렇게 생각하라우. 저눔이 못 갖고 있는 부분을 내래 보태줘서리 쓴다... 이렇게 말이디"(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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