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십자가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이선희 옮김 / 예담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유서에 이름이 등장한 네 명은 후지슌의 마음을 일방적으로 등에 짊어진 채, 그 이후의 인생을 걸아가게 되었다"(12).
처음엔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왕따"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에 학교를 다녀 다행이다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책을 읽어갈수록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따끔거리는 기억 하나가 나를 불편하게 했다. 중학교에서 왕따 당했던 자신의 흑역사가 공개되면 고등학교에서도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그래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한 아이의 유서를 읽으며 안타까워했던 날의 기억.
<십자가>는 왕따로 괴롭힘을 당했던 한 중학생의 자살 이야기로 시작된다. 작가가 "스스로를 가두고 2주 만에 써내려갔다"는 <십자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한 소년의 죽음을 뒤늦게 지켜봐야 하는 사람들의, 그 누구보다 절박했던 작가의 슬픔이 그대로 활자가 된 듯하다. 왕따 문제, 학교 폭력, 청소년 자살, 이런 뉴스가 터져나올 때마다 우리가 해왔던 일은 단지 '경박한' 분노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이런 문제들을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하며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제야 알았다. 생지옥 같은 학교를 매일 '의무적' 다녀야 하는 아이들의 고통, 자녀의 고통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부모의 고통, 아이들만큼이나 설벌한 학교가 힘든 선생님들의 고통을 내 것으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문제"였고, "그들의 고통"이었고, 그래서 나는 "문제야, 문제!" 한탄하고 "쯔쯔쯔" 혀를 차면서도 한 편으로는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그래서 다행이다" 안도하며 옆으로 비켜 서 있었을 뿐이다.
<십자가>는 한 소년의 자살, "그 이후"를 이야기한다. 느닷없는 현실에 고통을 가누지 못하는 부모, 책임과 변명 사이에선 학교, 무엇보다 그런 일들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지 모를 친구들(청소년들)의 삶을 보여준다.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는 그들의 입장에 감정이 이입되면서, 그것은 다시 자살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 한 소년의 안타까운 삶에 대해, 지금도 같은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을 아이들에 대해, 손 내밀어주지 못하는 우리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십자가>의 주인공(화자)은 "그 이후" 친구의 자살을 등에 짊어지고 인생을 걸어야 했던 같은 반 학생 "유 짱"이다. "후지슌"의 사건은 "제물 자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의 유서에 "나는 모든 아이들의 제물이 되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후지슌은 특별한 계기나 이유 없이 괴롭힘의 대상으로 "선택"되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다만 선택되었을 뿐이다. 같은 반 친구들은 후지슌을 제물 삼지 않으면 그 괴롭힘이 자신들에게 미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모른 척 했다. 괴롭힘 당하는 친구를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게 제물된 후지슌의 유서에는 네 명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사나다 유, 나의 절친이 되어주어서 고마워. 유 짱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할게."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후지슌을 왕따시킨 그룹의 중심 인물이었다. "미시마 다케히로, 네모토 신야. 영원히 용서 못 해. 끝까지 저주할 거야. 지옥으로 가라!" 네 번째는 여학생. 나카가와 사유리. "나카가와 사유리, 귀찮게 해서 미안해. 생일 축하해. 늘 행복하기를 바릴게.">
"후지슌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우리의 기나긴 여행의 시작이 되는 것이었다"(73). 유 짱은 후지슌을 한 번도 절친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후지슌의 유서는 일방적이었다. 죽어버렸으니 왜 그랬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후지슌의 "유서에 이름이 등장한 네 명은 후지슌의 마음을 일방적으로 등에 짊어진 채, 그 이후의 인생을 걸어가게 되었다"(12).
이의 제목이 '십자가'인 이유는 이 책의 명대사로 꼽힐 만한 이야기 속에 들어 있다. 혼다의 입을 빌어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람을 비난하는 말에 두 가지가 있다고 가르쳐준 사람은 혼다 씨였다. 나이프의 말. 십자가의 말. "이 두 가지가 어떻게 다른지 알아? 나이프의 말은 가슴에 박히지. 당연히 굉장히 아파. 쉽게 일어나지 못하거나 그대로 치명상이 되는 일도 있어. 하지만 나이프의 말에서 가장 아플 때는 찔린 순간이야"(74). 십자가의 말은 다르다고 했다. 십자가의 말은 평생 등에 져야 하는 말이지. 그 말을 등에 진 채 계속 걸어가야 해. 아무리 무거워도 내려놓을 수 없고 발길을 멈출 수도 없다. 걷고 있는 한, 즉 살아 있는 한 계속 그 말을 등에 지고 있어야 하는 거야"(75).
후지슌의 유서는 유 짱에게 십자가의 말이 되었다. 유 짱은 그것을 등에 지고 살았다. 괴롭힘을 당하는 후지슌을 지켜보며 유 짱은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로 녀석들을 싫어한다면 직접 행동을 취하리라. 부모님께 말할 수도 있고, 선생님께 의논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속마음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유 짱의 속마음은 이랬다. "후지슌이 괴롭힘을 당하는 동안 우리는 무사히 있을 수 있다. 우리는 후지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후지슌은 분명히 우리의 제물이었다. 우리는 후지슌을 제물로 삼아, 우리 자신의 의지로 그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18).
유 짱이 짊어진 십자가는 아마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이었으리라. 유 짱은 후일 자신이 아버지가 된 후에 후지슌이 왜 자신을 절친으로 불렀는지 어렴풋이 알게 된다. 그런 친구의 괴로움을 알면서도,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죽게 내버려두었다는 것, 그런 그를 원망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후지슌의 가족, 매섭게 몰아세우는 매스컴, 후지슌이 꾸었던 꿈의 흔적, 그 모든 것이 하나로 뭉쳐져 유 짱의 등 위에 얹혀졌다. 평생 지고 가아야 할 십자가가 되어.
어쩌면 이 책을 읽은 독자는 작가가 선택한 "유 짱"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일방적으로 독자의 등 위에 이 십자가를 올려 놓는다. 바로 우리가 자살을 하는 청소년들을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절친이라고, 바로 우리가 그들을 죽게 내버려두고 있는 장본인이라고 경고의 사이렌을 울린다. "이미" 떠난 그들의 죽음을 등에 지라고 말이다. 그 십자가가 내리누를 때마다, "아직" 손을 내밀 기회가 있을 때, 누군가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라고 말이다. 그래서 이 십자가는 우리가 함께 져야 할 십자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