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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또르 씨의 시간 여행
프랑수아 를로르 지음, 이재형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아이들을 볼 때, 그런 속도로 내가 늙어가고 있다는 상상을 하면 오싹해진다. 오랫만에 TV에 나오는 옛 청춘 스타들을 보면 무상한 세월이 쓸쓸해진다. 새치라고 우길 수 없는 흰 머리카락을 발견할 때, 언젠가 부모님과도 이별을 해야 할 때가 오리라는 것을 새삼 깨달을 때, 누군가 나이를 물어보는데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을 때, 마음이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 있다. 해질녘 텅 빈 학교 운동장에 혼자 남겨진 아이처럼,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 흘러가는 현재에 대한 초조함이 나를 겁먹게 한다. 여기저기 고장이 났다며 몸이 신호를 보내올 때마다 이제 내게 주어진 시간들은 더 이상 푸르지 않다는 생각에 기가 꺽인다.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의 치열한 싸움, 이것이 요즘 내가 매달려 있는 과제이다.
<엑또르 씨의 시간 여행>은 우리를 옥죄어 오는 그 '시간'에 대한 고찰이다. 미친 속도로 달려가는 시간의 열차에 타고 있지만 그곳에서 나올 수도 없고 늦출 수도 없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신과 의사 엑또르와 함께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게 더 나은가, 아니면 당장 내일, 혹은 머지않아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사는 게 더 나은가?"(58) 이런 의문을 품고 말이다.

<엑또르 씨의 시간 여행>은 "잃어버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찾아 헤매는 현대인들을 위한 심리 치유 소설"이라고 소개된다. 얼핏 보면 아름다운 동화같은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그러나 <엑또르 씨의 시간 여행>은 결코 가볍지 않은 여행이다. 일방적으로 지혜의 말들을 들려주지도 않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단편적인 조치를 취하지도 않는다. 엑또르 씨와 함께 떠나는 시간 여행은 깊은 철학적 성찰이며, 인생과 마주하는 진지한 대화이다.
<엑또르 씨의 시간 여행>이 주는 깨우침의 하나는 누구에게나 시간이 같은 속도로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손목시계의 초침은 세계 어디를 가나 똑같지만, 세계 사람들에게 시간은 모두 똑같이 지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84). 시간에 대한 감각은 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느냐 혹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절대적인 체감 온도도 있지만, 상대적인 체감 온도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학교(공부)가 지겨운 소년에게 시간은 더디기만 하고, 만일 흥미로운 일을 하고 있다면 시간은 더욱 빨리 지나간다. 이런 경우에는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있는 것보다 빨리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있는 사람이 시간(인생)에 대한 만족도가 더 높을 것이다. "열심히 살다보면 시간은 짧게, 기억은 길게 느껴진다"(74).

현재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엑또르 씨의 시간 여행>은 철학적 물음 앞에 선다. 어떤 철학자는 존재하는 것은 오직 과거와 미래뿐이라고 한다. 현재에 대해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그건 이미 과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존재하지 않는다(75). 어떤 철학자는 오직 현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미래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즉시 과거에 속해버리기 때문이다"(108).

<엑또르 씨의 시간 여행>은 독자에게 직접적인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엑또르 씨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아챌 수 있다. 엑또르 씨는 매 순간이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니 현재를 살라고 말이다. 인생은 음악과 같다는 이야기가 잔잔한 운율이 되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준다. "인생은 채워야 할 무슨 병 같은 게 아닐세. 그보다는 차라리 음악에 가깝지. 어느 순간에는 따분하게 느껴지지만 또 어느 순간에는 아주 강렬하게 느껴지는 음악 말일세. (...) 어떤 음이 자네를 감동시키는 건 자네가 그 이전의 음을 기억하고 그다음의 음을 기다리기 때문이지... 각각의 음은 어느 정도의 과거와 미래에 둘러싸여 있을 때만 그 의미를 가진다네"(223). 이렇게 생각하니 때로는 지루하게 느껴지는 시간도, 또 때로는 휘몰아치듯 흘러가는 시간도 모두 아름다운 하모니로 들려온다.
동물들은 미래 속에서도, 과거 속에서도 살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수명을 생각하는 것 같은 여러 가지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129). 엑또르 씨는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려 노력하고, 바뀔 수 없는 것은 그냥 받아들여라. 그리고 이 두 가지를 구분하라"(156)고 조언하며, 시간의 흐름에 대해 너무 자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엑또르는 생각했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게 딱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시간의 흐름이다. 그러니 그것에 대해 너무 자주 생각하지 않는 게 좋겠어!"(159)
어느 날, 문득 "내 삶 전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삶을 마감해야 하는 순간이 올 때, 그 삶에 대해 만족감을 느끼고 싶다는 바람이 나를 격한 긴장 속으로 몰아넣을 때도 있을 것이다. 시간을 꽉 채우려고 노력해보지만, 아무리 꽉꽉 채워도 시간은 끊임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곧장 허공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197) 것 같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성경을 쉬운 말로 바꾼 성경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내가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멋지게 잘사는 것은 하늘 아래서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인생은 비록 짧아도 하나님께 허락받은 것이니, 그렇게 살 일이다. 이것이 인생이 누릴 몫이다"(전도서 5:18). 이 말씀은 다시 이렇게도 번역이 된다. "자기 일을 즐겨라. 내가 관찰해 보니,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생애 동안 먹고, 마시며, 자신이 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것이 행복이요, 적절한 일이다. 그것이 인생의 몫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어진 시간의 끝을 알고 있고, 그것을 피할 수 없고, 그 끝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사는 것보다, '현재'에 충실한 삶, 그것이 엑또르 씨와 시간 여행을 함께 하며 내가 찾은 결론이다. 이러한 깨달음,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엑또르 씨의 시간 여행>이 주는 교훈은 내면 깊이 아로새겨진다. 요즘 여행 상품들을 보면, '고품격', '실속', '알뜰' 등으로 분류해놓는 경우가 있다. <엑또르 씨의 시간 여행>은 동화 같이 아름다우면서도 진지한 철학적 성찰이 있는 '고품격' 여행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 여행에 대한 만족도가 <엑또르 씨의 행복 여행>, <엑또르 씨의 사랑 여행>에 기대감을 높인다. 이 책들도 꼭 챙겨서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