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발견 : 시베리아의 숲에서
실뱅 테송 지음, 임호경 옮김 / 까치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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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천.천.히. 읽어주고 싶은 책입니다. 오랫만에 친구들을 만났는데 "떠나고 싶다", "뛰쳐나가고 싶다"고 외치는 친구들이 많았거든요. 한 친구는 가족 모두가 잠든 사이에 무조건 차를 끌고 나와 강남대로를 달렸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아들 녀석 도시락 걱정에 새벽녘에 집에 들어갔는데, 가족이 아무도 모르더라며 허탈하게 웃었습니다. 벗어나고 싶다, 도망가고 싶다, 숨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한 번쯤은 느끼며 살 것 같은데, 시베리아의 숲에, 그것도 영하 30도를 왔다 갔다 하는 한 겨울에, 나 홀로 오두막 살이를 선택한 한 남자가 있습니다.

 

37살의 나이에 바이칼 호숫가에 위치한 한 오두막에 둥지를 틀었던 이 청년(?)은 여행 중독자인가 봅니다. "프랑스 문단의 뛰어난 여행작가이자 에세이스트"라고 소개되는 이 남자는 "어느 공항 터미널에서 죽는 것을 꿈꾸기도 했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시간과의 해묵은 갈등을 해결하고 싶었다. 전부터 걸을 때면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다는 사실을 느꼈다. 또 여행의 연금술은 각 순간의 농도를 높여준다는 사실도 느꼈다. 길에서 보낸 순간들은 다른 순간들보다 덜 빠르게 흘러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열병에 걸려버렸고, 끊임없이 새로운 지평선들을 찾게 되었다. 그곳의 모든 것이 탈출과 출발을 권유하는 공항들에 열광하게 되었다. (...) 내 여행들은 탈출로 시작되어 결국에는 시간과의 경주로 끝나버리곤 했다"(37).

 

그리고 우연히 바이칼 호숫가에 위치한 한 오두막집에서 사흘을 보내게 된 이 남자는 "내게는 바로 이런 삶이 필요해"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여행이 내게 더 이상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 즉 평온함을 이 움직이지 않는 삶에서 얻을 수 있을 터였다(38). 그렇게 시베리아의 겨울과 봄, 2월부터 7월까지 6개월간 오두막 생활을 하리라 맹세했고, 그는 그 맹세를 지켰습니다. "야생의 숲에서 즐겁게 사는 것이 도시 한복판에서 시들어 죽어가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38)고 생각한 그는, "세계 최대의 담수호 기슭의 아름다운 숲에서 사는 사치"를 누립니다. "떠나는 것"에 중독되어 있었던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용기'가 아니라, 시베리아 숲에서 살아갈 단순한 '준비'뿐이었습니다.

 

시베리아 숲으로 찾아든 이 은둔자는 은둔자의 생활을 만끽합니다. 거추장스럽고 천박한 형편없는 취향의 문명의 때를 걷어내고, 신선하고 찬란한 아름다운 자연으로 그의 일상을 가득 채웁니다. 시베리아의 숲은 그에게 적응해야 할 곳이 아니라, 오히려 완벽한 곳이었습니다. 인구과잉과 온갖 소음으로부터 벗어난 오두막에서의 삶, 그곳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삶의 단순화였습니다. "오두막은 단순화의 왕국이다. 소나무 가지들을 지붕으로 삼는 삶은 본질적으로 몇 가지 활동으로 축소된다. 번잡한 일상잡사들로부터 해방된 시간은 휴식과 명상과 소소한 줄거움들로 채워진다. 해야 할 일들의 가짓수는 축소된다. 책 읽기, 물 긷기, 장작 패기, 글쓰기, 차 따르기 등이 전례가 된다"(41). 친구들은 그에게 "무료함은 너의 치명적인 적이 될 거야! 넌 심심해서 죽고 말 거야!"(109) 경고했지만, 은둔자는 단순한 삶이 가져다주는 자유와 숲이 주는 아름다움 속에서 마음껏 유영하며 삶의 생기로 충만합니다. "오두막은 간소함의 기반 위에 하나의 삶을 세우기 위한 완벽한 장소이다. 은둔자의 간소함이란 거추장스러운 물건들과 인간들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이전의 잡다한 욕구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은둔자의 사치는 아름다움이다. 그의 시선은 어디로 향하든지 더없는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 그는 기술이 창조하는 욕구의 굴레에 갇히지 않는다"(47).

 

은둔자가 시베리아 숲에서 발견한 자유는 어쩌면 '시간'으로부터의 자유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은둔자의 고백을 읽으며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의 실체, 그것이 바로 '시간'이었음을 알았습니다. "나는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드넓은 공간이라는 마약에 중독되어 있었다. 나는 시간을 쫓아 달렸다. 그것이 지평선 저 끝에 숨어 있다고 믿었다. "시간이 너무도 급히 흘러가는 것을 그것의 강렬한 사용으로 보상할 것), 이것이 내가 달아나는 시간에 대응하는 방식이었다. 자유로운 인간은 시간을 소유한다. 공간을 지배하는 인간은 단순히 강할 뿐이다. (...) 오두막에서는 시간이 진정된다. 그것은 착한 늙은 개처럼 당신의 발치에 엎드려 있고, 어느 순간 당신은 그것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된다. 내가 자유로운 까닭은 나의 나들이 자유롭기 때문이다"(75-76).

 

"친구야, 우리도 숲으로 한 번 떠나볼까?" 웃으며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숲은 혼자서 가야 하는 곳입니다. 그럴 용기가 있다면 말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각오해야 하는 여행이 될지도 모릅니다. 3월 17일, 서른일곱의 이 남자는 오두막 생활을 시작하며 자신에게 세 가지 의문을 품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견뎌낼 수 있을까? 나는 서른일곱의 나이에 다른 존재로 바뀔 수 있을까? 왜 나는 그리운 것이 전혀 없을까?"(111) 그런 그가 숲 속에서 경험한 가장 큰 고통은 아름다운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의 부재였고, 아내로부터 헤어지자는 다섯 줄의 문자를 받고 무너져내렸습니다. 숲 속에서 한 없이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다가, "이별 메시지를 받고 난 후 가장 슬픈 시간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친구에게 꼭 읽어주고 싶은 부분은 7월 26일의 일기입니다. 왜 숲에서의 생활이 시작되는 시점이 아니라, 그곳에서의 생활을 마치며 쓴 일기를 읽어주고 싶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의 자유는 6개월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 있었다는 것, 언젠가는 돌아가야 한다는 현실이 있었기에 그의 6개월이 그토록 아름답고 자유로웠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우리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하는 일상, 떠나고 싶어하는 현실도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사랑스럽게 다가옵니다. 문명의 대비가 존재하기에 숲의 숨결을 호흡하고 달의 운행을 좇는 숲에서의 삶이 특별해지는 것이라고요. 이 은둔자는 숲에서의 생활은 받아들임이라고 했습니다.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반항하는 인간은 쓸데없는 것이다. 숲의 나라에서 의미가 있는 유일한 미덕은 '받아들임'이다"(70). 받아들임은 숲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여기 이곳에서도 필요한 미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은둔자는 오두막 생활을 하며 시간에 경의를 표하는 세 가지 방식을 배웠습니다. "글쓰기, 그리기, 고기잡기"(263). 벗어나고 싶어를 외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것, 시간에게 경의를 표하는 방식 배우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우리의 삶이 따분하다면, 그 책임은 온전히 우리에게 있다. 세상이 칙칙한 잿빛이라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무미건조하기 때문이다. 삶이 창백하게만 보인다면? 삶의 방식을 바꾸어보자. 오두막에 가보라. 만일 숲속으로 들어갔는데도 여전히 세상이 칙칙하고 주변 사람들이 견딜 수 없이 느껴진다면, 판결은 명확하다. 당신 자신이 끔찍한 것이다! 그렇다면 필요한 조처를 취하라"(237-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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