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 40 - 중고생이 꼭 읽어야 할, 개정증보판 수능.논술.내신을 위한 필독서
김동인 외 지음, 박찬영 외 엮음 / 리베르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단편소설을 접했던 첫 기억은 부모님 곁에서 열심히 시청한 'TV 문학관'이 아닐까 합니다. 그중에서도 '백치 아다다'라는 작품이 기억에 남는데,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냥 어른들이 울면 나도 따라 울며 심각한 분위기에 젖어들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한국단편소설의 맛에 빠져들었던 시기는 고모의 상자 때문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함께 살던 고모가 독립을 한 후, 다락방 한 쪽 구석에 커다란 상자가 하나 놓였습니다. 고모가 필사한 시들이 적힌 수첩도 있었고, 사진첩도 있었지만, 대부분 책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문고판을 하나 은밀히 꺼내 읽었는데, 짧은 이야기들이었지만 그 느낌이 아주 강렬했습니다. 아이들은 마시지 말아야 할 쓴 커피를 몰래 마신 것처럼, 어른들의 비밀을 알아버린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도향이라는 이름을 그때 처음 외우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시대별로 작가와 작품 이름을 외우기에 바빴습니다. "다음 중 활동 시기가 다른 작가는?" "다음 중 작가와 작품의 연결이 잘못된 것은?" "괄호 안에 그 작품을 쓴 작가의 이름을 써넣으시오." 뭐 이런 문제들을 풀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작품이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참 달달달 열심히도 외웠습니다. 한 번은 도저히 작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아무 이름이나 써넣었다가 선생님께 "남자 친구 이름이니?"라는 핀잔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그때를 마지막으로 한국단편소설은 제 손에서 떠났습니다.

 

"중고생이 꼭 읽어야 할"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지만 <한국단편소설 40>을 보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어린 가슴을 울렁이게 했던 "소나기", 내용도 모르면서 흉내를 냈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제목만 들어도 낭만적인 기분에 젖게 하는 "메밀꽃 필 무렵", 참 지독히도 슬펐던 "운수 좋은 날", 청년의 시기에 뜨거운 마음으로 읽었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을 다시 읽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중고생이 꼭 읽어야 할 한국단편소설 40>은 김동인의 "배따라기"를 시작으로 1920년대 작품부터 1970년대에 발표된 이청준의 "눈길"까지 시기별로 총 40편의 대표작을 선별해 수록했습니다. 이 책은 단순히 단편소설을 엮어낸 작품집이 아닙니다. 소설을 읽기 전에, 한국단편소설의 시대별 특징, 작가와 작품에 대한 설명, 구성과 줄거리를 파악하고, 생각해 볼 문제까지 제시해줍니다. 그리고 나서 본격적인 소설 읽기에 들어갑니다. "수능 시험, 수행 평가, 논술 고사에 대비해" 짜임새 있게 꾸며져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소설을 그저 소설로 감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 어떨까 하는 배부른 생각도 듭니다.

 

<한국단편소설 40>을 다시 읽으며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온 감상은 중고생이 읽어야 할 소설의 주제가 참으로 묵직하구나 하는 것입니다. 흔히 접할 수 있는 청소년을 위한 성장소설이 아니라, 일제 강정기하의 민족의 빈곤과 그 속에서 파괴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엄성을 그린 작품(감자), 조국(사회)의 현실에 절망하는 지식인(술 권하는 사회), "인간의 이중성을 희극적으로 묘사한 심리주의 소설"(B사감과 러브레터), "극심한 이데올리기의 갈등 양상"을 보이는 광복 직후에서 6.25 전쟁까지의 작품들, "독재 정권의 경제 성장 정책으로" 소외된 민중의 삶을 그린 1970년대 작품들까지 이 어렵고 무거운 주제들을 청소년들은 어떻게 소화하고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한국단편소설 40>을 읽으며 다시 생각했습니다. '역사' 과목으로도 '역사'를 배우고, '사회' 과목으로도 '사회'를 배우고, '심리학' 과목으로도 '심리학'을 배우지만, 우리는 '소설'로도 역사를 배우고, 사회를 배우고, 심리학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소설이 말하는 역사의 비극, 사회의 부조리, 개인의 고통과 좌절,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시대의 아픔은 우리가 진실이라고 소리내어 말하는 사실들보다 더 진실한 그 무엇을 가르쳐줍니다. 이야기(소설)는 독자를 울고 웃기는 힘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는 글로벌 시대를 맞이하여 일본 소설에 열광하고, 유럽 소설의 매력에 사로잡히고, 아시아 소설까지 쉽게 탐독할 기회를 얻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이 담긴 옛 앨범같은 <한국단편소설 40>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화들짝 놀라게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내 핏속에 흐르는 이야기를 읽은 기분이라고 할까요. 이런 것을 우리끼리 통하는 우리만의 '정서'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웃다가, 오랫만에 나의 이야기 속으로 침전하여 속울음을 울고 난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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