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저
나카 칸스케 지음, 양윤옥 옮김 / 작은씨앗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제 기억 속에 가장 넓은 세상은 학교 운동장이었습니다. 아빠 손을 잡고 덕수궁에도 가고, 경복궁에도 가고, 동물원에도 가고, 식물원에도 가고, 대공원에도 갔었지만, 이상하게 내가 정복하지 못할 가장 너른 세상은 학교 운동장이었습니다. 그 큰 운동장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막상 그 운동장에 서니 오지 말껄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습니다. 기억 속 운동장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억 속의 그 넓은 운동장은 어느 새 손바닥만하게 쪼그라들어 있었습니다. 제가 훌쩍 커버린 탓이겠지요. 그래도 "어린 시절" 하면, 제 기억이 제일 먼저 달려가는 곳은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았던 골목길과 그 운동장입니다.

 

당신 기억 속의 어릴 적 세상은 어떻습니까? 행복했습니까? 모든 것이 신비로웠습니까? 혹시 고통스러운 기억뿐입니까? 나카 간스케의 <은수저>는 내 어릴 적 세상은 어떠했는지 다시 떠올리게 해주는 책입니다. "일본 문학 사상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하고, '일본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라는 작가가 극찬한 "일본 문학의 최고봉"이라고 하니 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맑은' 이야기 속으로 마음이 퐁당 빠져들었습니다.

 

"나는 항상 그런 어린아이다운 경탄을 품고 내 주위를 바라보고 싶었다. 사람들은 많은 것에 익숙해지면서 그야말로 흔히 보아온 것이라는 듯 무심코 지나쳐버리지만, 생각해보면 해마다 봄이면 눈뜨는 새싹은 해가 갈수록 다시금 새롭게 우리를 놀라게 할 일이리라"(216).

 

<은수저>는 어린 아이의 눈이 바라본 세상을 '상상'으로 써내려간 소설이 아닙니다. 기억을 더듬고 있지만, 그것은 그대로 어린 아이가 보는 세상이었습니다. 어쩌다 꾸지람을 듣고 실컷 울고 난 후에, 장난감을 늘어놓고 만지작거리다 울음을 그친 게 억울해서 다시 쉴 새 없이 눈물을 훌쩍거리며 "내 편이 이렇게 많으니까 괜찮아, 괜찮아"라는 마음으로 집안 식구들을 하나하나 원망하며 앉아 있었다는 아이의 고백(55)에 살며시 미소가 지어집니다.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며 "내 편이 이렇게 많으니까 괜찮아, 괜찮아"라는 아이의 마음이 귀엽고, 내게도 똑같은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병약하게 태어나 천성적으로 우울증이 있는 아이가 업어 키워준 이모님 옆에 찰싹 달라붙어 낯을 가리고, 그 이모님과 즐거운 놀이를 하고, 첫 친구를 사귀고, 처음으로 학교에 가고, 토라진 친구와 화해를 하고, 이성 친구와 괜히 서로를 툭툭 치며 놀고, 파도소리가 슬퍼서 눈물을 흘리고, 동생을 남자답게 교육시켜보겠다는 형과 대립을 하고, 자연과 소통하고, 인생을 바라보는 눈을 키우는 과정이 은은한 울림을 주는 문장에 아름답게 담겨져 있습니다. "천진함이라든가 쾌활함 같은 보통 아이들이 누리는 행복의 대부분을 상실해버린 아이답지 않은 아이"가 바라보고 소통하는 세상은 위태하고 두려운 곳이면서도 따뜻한 햇살처럼 정답고 눈부신 곳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는 세상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 "형에게서 큰 비판을 받았던 그 성격을 북돋아 키워서 그 뒤의 나를 형성"(226)해 갑니다.

 

책의 끝에 실린 '추천사'에 보면, "어느 고등학교의 국어교사가 정규 교과서를 사용하지 않고 3년 동안 <은수저> 하나만 가지고 천천히 읽고 깊이 이해하는 수업을 함으로써" 이 책이 더욱더 주목을 받았다는 증언이 이어집니다. "그 수업에 힘입어 시골에 있는 그 학교가 일본 전체 고등학교를 통틀어 도쿄대 합격자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279)고 합니다. 1910년대를 전후로 한 일본의 문화와 생활 풍경도 엿볼 수 있고, 아침 가을 하늘처럼 투명하고 청아한 문장을 읽으며 영혼의 때가 씻기는 맛도 느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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