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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을 읽어야 할 시간
이케가미 아키라 지음, 오세웅 옮김, 김공회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하지만 최근 신자유주의가 닥치면서 경제를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는 명목 때문에 그런 울타리(노동자의권리를 지켜주는 여러 가지 법과 회사에 대한 규제)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런 후에야 우리는 깨닫게 되었지요. 마르크스가 19세기에 말한 것과 똑같은 일이 역사 속에서 반복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289).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며 알째배기 공기업들을 민영화하려는 정부가 정권을 잡고 있고, 또 잡으려고 혈안이 된 지금이야말로 대한민국이 <자본론을 읽어야 할 시간>이 아닐까 합니다. 아니 '이제라도' 자본론을 읽어야 할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확한 표현일 듯합니다. 그나마 이런 책을 들고 다니며 지하철 같이 사람이 많은 곳에서도 버젖이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입니다.
사회주의가 망했다고 축배를 드는 동안 세계는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에 먹히며 말로만 듣던 '공항'의 공포를 다시 마주하고 있습니다. 마치 지금의 사회를 들여다보며 분석하고 비판한 것처럼, 마르크스가 145년 전에 분석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스스로 마르크스의 망령을 다시 불러내고 말았습니다. 복지와 지식인의 역할을 간과했다고 비웃으며 실패로 간주했던 마르크스의 사상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자본주의 스스로 증명한 셈입니다. <자본론>을 다시 꺼내든 이 책의 저자 이케가미 아카라는 "자본주의가 이긴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내세운 나라들이 스스로 쓰러진 것뿐"(26)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문제는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한 러시아는 당시 자본주의가 거의 발달하지 않은 가난한 봉건국가였고, 사회주의 혁명의 중심이 노동자가 아니라 마르크스의 사상을 추종하는 일부 지식인이었다는 것입니다(43).
<자본론을 읽어야 할 시간>은 한 학기 강의노트처럼 정리되어 있습니다. 총 16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본론>의 문장을 직접 인용하여 주석하는 방식으로 자본론에서 말하는 주요 쟁점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합니다. 화폐가 어떻게 자본으로 바뀌는지, 끊임없이 불어나고 싶어하는 자본의 욕망과 인간의 탈을 쓴 '돈'이 어떻게 인간을 돈의 노예로 만드는지, 왜 자본가는 자연스럽게 잔인한 경향을 갖게 되는지 등 마르크스가 밝힌 자본주의의 시스템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해석해줍니다.
"돈을 늘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 잔인하면서도 서글픈 삶의 한 단면을 다시 보았습니다. 돈만 벌 수 있다면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도, 사회에 해가 되는 것들도 얼마나 만들 수 있고, 어떤 불법적인 행위도 서슴치 않으며, 당장 이득이 된다면 이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신경 쓰지 않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뒷일은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사고 방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또 그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있는지 새삼 깨닫습니다. 통장 잔고를 보며 인생 계획을 세우는 저도 여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노동자의 입장이 아니라 자본가의 입장이었다면 반응이 달랐을까요.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한 사람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모순, 미국의 월마트처럼 글로벌한 거대 자본 아래서 세계인이 빠르게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 앞에 무기력감을 느낍니다. 마르크스의 사상에 의해 세계가 움직였고 새로운 역사가 잉태된 것처럼, 세계는 또 한 번 마르크스의 사상에 영향을 받게 될까요. 아니면 자본가가 쥐어주는 사탕에 만족하며 지금과 같은 시스템이 계속 될까요. 마르크스는 우리가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다고 하였지만, 금사슬에 길들여진 우리에게는 잃어버릴 것이 조금 더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착취 당하는 자들에게 꼭 필요한 '적극적 연대'에 회의가 생기기도 합니다.
<자본론을 읽어야 할 시간>은 혁명을 선동하는 책은 아닙니다. 세상을 휩쓸고 있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냉정하게 들여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마르크스의 뜨거운(?) 성정에 비해 동화책(?)을 읽어주는 듯한 다정한 목소리 때문에 이 책이 조금 싱겁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본론을 읽다 포기한 독자라면, 자본론을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독자라면, 먼저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요점이 귀에 쏙쑥 들어오게 설명되어 있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