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멘토 버트 도드슨의 드로잉 수업
버트 도드슨 지음, 안미정 옮김 / 미디어샘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은밀한 사생활, 드로잉!

 

 

그림을 그리기 전, 흰도화지를 앞에 두면 처음 선 하나를 긋기가 그렇게 힘이 들었습니다. 무엇을 그릴까 하는 고민도 컸지만 잘 그리고 싶은 욕심에 아마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 첫 선을 긋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칠 때는 흰도화지보다 먼저 신문지 같은 종이 위해 그림을 그리며 놀게 하는 것이 좋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고 깬 아침 하얀 눈이 가득한 앞마당을 바라보며 경외감을 느끼는 아이들이 마당에 쉽게 발을 내딛지 못하는 것처럼, 흰도화지에 대한 두려움, 그러니까 '이 종이를 망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을 없애는 데 효과적이라고 했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두려움이 컸던지 하얀 도화지 위에 선을 하나 긋기가 그렇게 힘이 들어서, 살짝 한 번 그어보았다가 금방 지우개로 다시 지우고, 또 다른 선을 하나 그려보았다 다시 지우개로 지워버리는 행동을 반복했던 기억이 납니다.

 

세계적인 일러스트레이터이자 화가라는 '버트 도드슨'의 <드로잉 수업>은 첫 단계부터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제일 먼저 그림을 그릴 때, "종이에 집중하지 말고 대상에 집중하라"고 일러줍니다. "그림을 그릴 때 여러분은 어디를 보고 그리나요?"라는 질문을 받고 보니 그동안 대상보다 종이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드로잉 멘토는 이렇게 말합니다. "대상에 정신을 집중시키고, 종이는 선을 그리기 위해 힐끗 보는 정도로만 해야 실력이 늡니다." 더 나아가, 대상에 집중하며 대상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단어를 반복하며 그림을 그리라고 일러줍니다. 예를 들면, "날카롭다", "길다", "둥글다"와 같은 말들을, "손을 움직이면서 조용히 스스로 반복하며 말하다 보면, 바라보고 있는 대상에 대한 인상을 간직하게 되어 실제로 그 인상을 표현하기 쉬워"진다고 합니다(15). 저자는 이렇게 반복하는 말을 '제시어'라고 정의합니다. 어떻습니까? '아하, 그렇구나' 하는 신선한 깨달음으로 머릿속에 환해지지 않나요? 이런 것을 배움의 즐거움이라고 하는가 봅니다.

 

<드로잉 수업>을 받기 전에는 "그림은 과학이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명작에 숨어 있는 과학적 요소를 설명하는 책을 접할 때마다 정말 감탄해마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드로잉 멘토 버트 도드슨은 이러한 편견(?)을 또 여지 없이 깨주었습니다. 우리의 멘토는 이렇게 말합니다. "드로잉은 본질적으로 엄격한 공식의 적용이라기보다 단지 '보는 과정' 중의 하나"라고 말이죠. 그래서 그의 <드로잉 수업>은 '보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을 믿는 방법과 그 믿음을 강화하는 방법을 일러주며, 그리려는 대상에 집중하고 우리의 눈을 믿으라고 조언합니다. 이론을 잊고 보이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그리라는 것입니다. 그의 드로잉 수업에는 '생각하기'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드로잉 수업>에 이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정확한 비례를 위해 중심을 잡는 조준법을 배우고, 수직과 수평의 위치도 잡고, 비교계측, 단축법, 정밀한 계측도 배웁니다. 비례를 얼마나 쉽게, 빠르게, 또 정확하게 그려내느냐가 드로잉 실력을 가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정확한 비례를 나누는 것은, 연습과 훈련을 통해 가장 향상하기 쉬운 드로잉 능력 중에 하나"(96)라고 하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그것처럼 '빛의 환영'을 재현하는 방법도 배우고, 공간감, 질감, 패턴과 구도까지 착실히 배우고, 상상이라는 창조적인 놀이의 경지에까지 이릅니다.

 

드로잉에 관심을 가지고 드로잉에 관한 책을 보다보니 그림의 핵심은 '관찰'이라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좋은 관찰자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드로잉 수업>을 받았다고 해서 드로잉이 갑자기 쉬워지지는 않았습니다. 일러스트를 따라 배우는 과정은 즐거웠지만 마음속으로는 '언제 이렇게 연습을 하지?'라는 좌절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도 늘 감탄하기만 했던 대가들의 드로잉의 비결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되는 과정이 즐거웠고, 피나는 연습을 할 열정은 없을지라도 <드로잉 수업>을 받기 전과 받은 후의 나의 그림 실력은 확실히 차이가 나리라 믿어봅니다. 적어도 무대포식 낙서 수준은 조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생깁니다. 당분간은 시간이 날 때마다, <드로잉 수업> 중 어느 한 곳을 펼쳐들고 '모사'를 해볼 작정입니다. 흉내만 내도 실력이 놀랍게 향상된다는 저자의 이야기를 믿고 말이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