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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 역사를 부치다
나이토 요스케 지음, 안은미 옮김 / 정은문고 / 2012년 6월
평점 :
우편학으로 보는 역사
오늘(7/3) 여성그룹 소녀시대를 모델로 한 우표 '소녀시대 나만의 우표'가 8월 초 발매된다는 보도가 있었다. 우정사업본부가 발행하는 최초의 연예인 우표란다. 우정사업본부는 "글로벌 케이팝 열풍의 주역이자 전 세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는 소녀시대를 모델로 특별 제작했다"고 발매 취지를 밝혔다. 훗날 역사는 '소녀시대 나만의 우표'를 필터로 글로벌 케이팝 열풍의 열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읽어내며 '한류'라는 독특한 문화 코드를 연구할지도 모르겠다.
<우표 역사를 부치다>는 '우편학' 분야의 권위자로 알려진 나이토 요스케의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의 취지를 이렇게 요약한다. "이 책에서는 미국과 격렬한 관계를 맺어온 국가나 지역을 중심으로 미국이 세계의 제왕이 되어가는 과정과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들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되돌아본다. 그것도 한국 독자에게는 낯선 '우편학'이라는 방법을 이용해서 말이다"(9). 우편학이라는 단어가 생소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우편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니 생소한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편지나 엽서에 붙은 우표와 찍힌 소인 등을 분석해 우표가 만들어지고 통용된 시대와 사회의 모습을 밝혀"내는 우편학이 존재한다. "우편학"이라는 이름은 우표 수집 및 연구라는 개념(philately)라는 개념을 필자가 번역해 정립한 단어라고 한다. 그동안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우취'라는 뜻의 단어로 번역해왔다. 저자가 '우편학'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정립한 것은 단순한 우표수집과 구분짓기 위해서이다.
"근대 이후 국민국가에서 우편 관련 업무는 기본적으로 정부 당국이 담당해왔다"(10). 우편학이 어엿한 학문으로 자리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우표는 원칙적으로 국가가 발행을 하기 때문에, 우표에는 그 시대 정부와 정권의 정책, 이데올로기 등이 반영되어 있으며, 국가의 역사관 등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표에 찍힌 소인을 통해 우편 서비스, 행정 상황 등을 알아볼 수도 있다. 몇 해 전인가, 우리나라가 독도를 주제를 우표를 발매하자, 일본에서 독도를 주제로 한 우표가 붙은 한국 우편물은 반송하겠다며 발행 중단을 요구하는 항의가 있었다고 들었다. <우표 역사를 부치다>는 단순한 우표 한 장이 정치, 경제, 문화, 생활상 등은 물론 우표 요금 수준, 디자인, 인쇄술 등을 통해 발행국의 경제적, 기술적 수준까지 엿볼 수 있는 훌륭한 미디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저자가 특별히 우편학을 통해 미국 제국주주의 역사를 재구성해내는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 전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서 우편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는 점도 큰몫을 차지하는 이유일 것이다. 게다가 "평화롭고 안정된 국가보다는" "정치나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국가나 지역일수록 당시 변화와 분쟁의 흔적이 우표에 선명하게 남"는다는 이유로 격렬한 변화나 분쟁이 있었던 국가(북한, 베트남, 이란, 쿠바, 소련, 필리핀, 일본, 이라크)를 중심으로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확장해온 미국과의 역학관계를 재구성한다.
<우표 역사를 부치다>는 우리에게 생소한 우편학이지만 그렇다고 역사를 새롭게 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표에 담긴 보다 깊은 역사적 의미를 캐내거나, 사회적 분위기를 읽어내고, 정치적 꼼수를 폭로하기도 한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했던 한 장의 우표 안에 참 많은 것이 담겨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우편학이 정말 소중하구나 생각하게 되었던 것은 역시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부분에서였다. 저자는 북한의 우표가 남침을 기록하고 있다고 밝힌다. 7월 10일에 북한이 서울 점령을 기념해 발행한 우표를 보면, 서울의 정부청사에 걸린 북한 국기가 보인다(45). 저자는 이를 근거로 "전시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더구나 보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안에 우표를 발행한 점으로 미루어 북한이 사전에 우표 발행을 준비했음을 말해준다"고 해석한다. 남침의 흔적은 이것만이 아니다. 1950년 북한에서 발행된 '해방 5주년' 기념우표도 그 증거 중 하나이다. "1950년 8월은 한국전쟁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해방 5주년' 기념행사를 열 수 없었다. 실제로 남한은 기념우표조차 발행하지 못했다. 그에 비해 북한은 공식 기념일보다 2개월여 이른 6월 20일에 서둘러 '해방 5주년'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나름의 이유를 갖고 광복 기념우표를 2개월이나 앞당겨 발행한 것이다. 이는 실제 광복 기념일에 해당하는 8월 15일에 광복 기념우표를 발행하는 게 불가능하가거나 또는 어려울 거란 사실을 미리 알았다는 증거다"(43). 지금도 북침을 주장하고 있는 북한이 우표를 통해 제스스로 남침의 증거를 남겼다는 사실을 알까 모르겠다. 6.25가 조선시대 전쟁이라고 답하는 초등학생도 많다고 하는데, 우편학을 통해 역사를 가르치는 것도 신선한 접근일 듯하다.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으면 답변이 굉장히 한정적이라고 한다. 직업의 종류가 많지 않은 것은 그만큼 우리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이며, 또 상상력의 부재를 드러내는 한 단면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에게 생소한 우편학이라는 존재는 다시 또 우리의 경험부족과 부족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단적 증거인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생긴다. 다양한 분야에 다양하게 도전하며 접근하는 모험심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우편학이라는 생소한 분야를 살짝 엿봤다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