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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리즘 철학 - 간결하고 매혹적인 철학에의 탐구
조중걸 지음 / 한권의책 / 2012년 4월
평점 :
"형이상학적인, 너무도 형이상학적인"
영국 철학자이며 정치가인 버크의 아포리즘이다. 프랑스 혁명을 반대한 그는 "프랑스 혁명이 성립시킨 인권선언에 대해 이와 같이 개탄"했는데, 다른 말로 말로 하면 "공허한, 너무도 공허한"이라고 한다(165). "온건한 상식에 입각하는 경험론적 입장에서의 프랑스 혁명과 인권선언은 기존의 앙샹레짐만큼이나 허황되고 공허한 형이상학적 이상주의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지금까지 서양철학사는 합리론(형이상학)과 경험론의 싸움터로 보인다. 이 두 철학사조는 영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에도 각각 영향을 미쳤다. "시민사회로 이르는 정치혁명에 있어서 영국과 프랑스는 상이한 경로를 밟는다"(163). 영국에서는 왕과 부르주아가 결탁하여 귀족계급과 상층교권계급을 효과적으로 억누를 수 있었지만, 프랑스는 "어리석게도 왕이 궁극적으로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귀족과 결탁했고 이것이 피를 부르는 혁명을 불러왔다"(164). 영국이 비교적 순조롭게 구체제에서 신체제로 이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경험론적 전통"을 가졌기 때문이고, 버크가 프랑스 혁명이 성립시킨 인권선언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너무도 형이상학적인"이라고 개탄했던 것은 "형이상학적 기질을 가진 프랑스인들이 앙샹레짐을 뒷받침하던 합리론적 철학을 다른 종류의 합리론적 철학으로 바꾸었다는 데 있었다"(165)는 것을 이 책은 꼬집어준다. 역사를 보는 새로운 방식에 눈이 떠지는 기분이다.
그.러.나. 내가 "형이상학적인, 너무도 형이상학적인"이라는 아포리즘의 탄생 배경을 이렇게 길게 쓴 이유는 따로 있다. 유명한 철학 아포리즘을 중심으로 서양철학사의 맥을 짚어가는 <아포리즘 철학>을 읽고 나니 철학사가 흘러내려온 물줄기를 지도를 펼쳐놓고 보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문제는 (맞는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내게 철학은 여전히 "형이상학적인, 너무도 형이상학적인" 차원의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 우리 삶에 가까이 있는데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사는 클래식 음악처럼, 철학적 논의는 여전히 내가 끼어들 자리가 없는 '고차원'에 존재하여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그.러.나. 다시 철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바로 이것이 <아포리즘 철학>을 통해 얻은 하나의 소득이다. 여전히 손이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있지만, 딛고 올라설 벽돌 한 장을 얻었다고나 할까.
<아포리즘 철학>을 통해 새롭게 눈 뜬 사실이 있다면, 바로 경험론의 위력이다. 솔직히, 이제까지 경험론을 다소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그런데 경험론은 내가 생각하는 그 이상이었다. "존 로크, 조지 버클리, 데이비트 흄으로 이어지는 영국의 경험론적 철학은 그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된다. 경험론적 인식론에 의해 근대는 붕괴되며 따라서 인간 이성이 지니고 있다고 믿어졌던 전능성 역시도 붕괴된다. 데카르트 이래의 지적 자신감은 커다란 타격을 입는다"(126). 또한 "버클리는 우리가 경험론을 믿는 순간 우리 지식의 보편성은 사라지며 따라서 사회적 질서도 사라진다고 말한다"(134). 앞서 영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에서도 보았듯이 합리론과 경험론은 사회정치적 시스템에도 상반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합리론은 언제나 어떤 종류의 위계적 질서를 요청하고, 경험론은 언제나 극단적인 형태의 민주주의를 요청한다. 이것은 앞으로 오게될 사회정치적 시스템에서도 계속 되풀이된다"(128). 경험론은 윤리와 종교에도 그 영향력이 대단하다. "윤리학에서 실재론은 자유의지론으로 이끌리고, 경험론은 결정론으로 이끌리듯이 신학적 경험론에서 비롯된 개신교의 이념은 예정설을 불러들인다." 또 "윤리적 결정론하에서 인간의 행위는 순간을 사는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 이때 인간은 실존을 자각하게 되고 부조리를 느끼게 된다. 이것이 현존을 본질보다 우선적인 것으로 만들고 지금 이 순간의 열정과 분투만이 유효한 윤리적 기준을 충족시킨다"(117).
철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독자가 있다면 개론서 다음으로 <아포리즘 철학>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철학적 기초 지식을 가지고 읽는다면, 아포리즘을 중심으로 공부하는 이러한 방식이 분명 높은 수준의 철학에 도달할 수 있는 사다리가 되어줄 것이라 생각된다. 간명한 문장에 합축된 진리를 담은 아포리즘, 생각할수록 매력적이다. "고대 말에 인간이 죽었다면 근대 말에는 신이 죽었다"(139). 이것은 철학 아포리즘 만큼이나 인상적인 글귀이다. 나는 이것을 저자 조중걸 선생님의 아포리즘으로 기억하려 한다.
철학적 논의가 저기 하늘 위에서 이루어지는 수준 높은 지식인 것은 분명한데, 철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중요한 한 가지는 흄의 말처럼 "우리가 겸허해야 한다"(146)는 사실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모두 자기의 제한된 경험의 테두리 내에서 지식을 형성하고 그것을 근거로 판단한다. (...) 흄은 상식에 입각하기를 권하고 자신의 습관을 잘 살피기를 권한다. 신념은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독단만큼이나 회의도 무섭고 회의만큼이나 독단도 무섭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노선을 따르든, 지식이라는 것이 머리에 담기면 담길수록 더욱 겸허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