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톨의 밀알 - 개정판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5
응구기 와 시옹오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작가이고, 노벨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이며, "형식이나 내용 등 모든 면에서" 이 작가의 최고작으로 평가받는 소설이라는 설명을 미리 듣지 않았다면, 아마도 관심 갖지 않았을 듯하다. 제국주의의 무게에 억눌리고 강탈당하는 식민지 국민의 울분과 잔혹한 삶의 이야기는 이미 우리에게는 '낡은' 주제이기 때문이다.

 

<한 톨의 밀알>은 백인 정권 아래 억눌리며 살아야 했던 세 차원의 흑인 젊은이들을 주인공으로 한다. 밭과 곡식을 돌보며 살아가는 무고는 가진 것이 없었지만 미래가 있었다. 케냐의 독립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믿었던 키히카는 '단결'을 호소하며 백인 정권에 피의 저항을 감행한다. 여기에 그녀의 여동생 뭄비와 기코뇨의 사랑, 그리고 뭄비를 사랑했던 또 한 남자 카란자가 이야기의 큰 틀을 이룬다. 운명으로 얽혀진 이들의 이야기가 전체적인 윤곽을 드러내기까지, 초반부는 다소 지루하다. 이야기가 갑자기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는 지점이 있는데, 그곳에 도달하기 전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사전 정보'가 다소 필요할 듯하다. 무고를 읽을 때는 그의 내면에 숨겨진 '죄의식'의 정체를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기코뇨와 뭄비를 읽을 때는, 오직 가족과 함께하고 싶다는 소망 하나로 조직까지 배반하고 수용소에서 돌아온 기코뇨는 그토록 그리워했던 아내 뭄비를 왜 그처럼 차갑게 대하는지, 그리고 그들은 결국 어떻게 화해에 이르게 되는지를 지켜보며 그 '과정'을 탐구하듯 즐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카란자를 읽을 때는, 키하카의 친구였던 그가 어떻게 백인 정권에 기생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그에게 실연의 상처는 조국을 잃은 식민의 상처만큼이나 치명적인 좌절이었다는 것을 감지하면 좋을 듯하다. 이들의 운명의 실타래는 그들의 독립기념일 축제에서 비로소 풀어지기 시작하는데, 작가가 그려내는 서정적 결말이 압권이다.

 

역사 이래 힘 있는 자는 천하 통일의 꿈을 꾸었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밟아며 권력의 짜릿함을 만끽하며, 바닥이 없는 그들의 탐욕을 채웠다. 그들에게도 고상한 명분이 있었겠지만 영국은 그렇게 케냐를 짓이겼고, '국가'나 '애국심'이라는 단어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케냐'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다시 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운명의 수레바퀴 밑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들은 우리를 도로나 채석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조차 말입니다. 우리를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훔쳤거나 누군가를 죽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조상대대로 우리 것이었던 것들을 되돌려달라고 요구했을 뿐이었습니다"(115).

 

<한 톨의 밀알>이 보여주는 젊은이들의 삶이 더 가슴을 시리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피로 목욕을 하면서까지 지켜내고 얻어내려 했던 것이 '일상성'이라는 데 있다. "우리가 갖고 있던 명분이 좋아 그때 살아남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라를 사랑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다면 누가 죽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집을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여자들이 웃고, 아이들이 싸우고 우는 것을 볼 날을 기다렸던 것입니다"(116). 노예로 살아야 했던 그들에게는 '삶'이란 게 없었다. 그들은 그저 자유롭게 춤추고 싶었고, 사랑하는 여인에게 기타를 쳐주며, 그들의 땅에서 땅을 일구고, 가정을 일구며 살고 싶었을 뿐이다. 대단하고 특별한 그 무엇이 아니라, 그 평범한 일상을 얻고 싶었을 뿐이다. 

 

그들은 깨닫는다. 힘 없는 사람들이 힘 있는 사람들을 대항하기 위해서는 '단결'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는 강력한 조직이 필요하오. 백인들은 이것을 알고 두려워하고 있소. (...) 그들은 우리의 유일한 힘인 민중들로부터 우리를 차단시키고 싶어하오"(337).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삶을 얻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케냐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는 죽음이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진정한 희생이 필요한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죽고, 당신은 나를 위해 죽을 수 있어야 서로가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169-170).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땅에 떨어져 썩어져야 할 그 한 톨의 밀알이 필요했다. "그러나 소수가 죽으면 다수가 사는 것이오. 바로 그것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의 의미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백인을 위해 영원히 물이나 긷고 장작이나 패는 저주받은 노예가 되어야 마땅하오."(337)

 

그들의 유일한 힘은 '단결'이었던 까닭에, 그들은 '배반'과 '죄의식'이라는 새로운 굴레를 짊어져야 했다. '단결'은 강요되었고, 무자비한 칼 앞에 '자신의 삶'을 지키고 싶었던 사람들은 배신의 쓴 잔을 받아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칼이 들어와도 도망가지 않을 사람"(158)이 필요했고, 그들의 가슴이 식어지지 않도록 불을 질러줄 영웅이 필요했다. 그러나 민중은 영웅을 노래하고, 한 사람은 영웅으로 부름을 받지만, 그 영웅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약한 자아와 두려움 가운데 씨름하고 있다. 민중은 캄캄한  밤하늘에 별처럼 빛나는 영웅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그를 떠받들고 있지만, 사실 '영웅'으로 기대를 모았던 많은 인물들이 얼마나 많이 자신의 연약함과 두려움과 개인적인 욕망과 싸워야 했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떤 영웅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한 톨의 밀알"이 되도록 강요받고, 그 벼랑 끝으로 내몰리기도 했으리라.

 

<한 톨의 밀알>이 가진 힘은 케냐의 이야기이지만, 특정한 시대적 배경 속에 담긴 이 이야기가 어느 삶의 자리에서도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라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그들의 이야기이지만, 또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짓밟는 권력과 피의 저항이 충돌하는 속에서도 그들이 빚어내는 열정과 고뇌와 사랑이 그래서 더 아름답다. 기코뇨가 뭄비와 화해하며 결혼선물로 조각할 걸상에 "임신을 해서 배가 불룩해진 여인을 새겨야겠어"라고 말하는 마지막 한 마디가 오래도록 시리게 가슴에 남아 있다.

 

"나도 따뜻한 나롯불 맛을 알고, 난로 옆에서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 좋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이오"(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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