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수근 평전 : 시대공감
최열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험난한 20세기 예술이 꿈꾸던 '격조(格調)와 고담(故淡)'의 세계를 다잡은 예술가로 우뚝 섰다(249).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며,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가장 즐겨 그린다"(243).
밀레, 마네, 모네, 세잔, 고갱, 고흐, 고호, 카라바조, 피카소, 클림트, 뭉크, 마티스, 샤걀, 르느와르, 드가 등등 서양의 화가들 이름과 작품은 꽤 열거할 수 있겠는데, 한국의 서양화가 중 이름을 아는 이는 '박수근'이 유일하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그의 생애를 소재로 한 소설 때문이었다. 그를 기억하고 좋아하게 된 것은 '조국의 화가'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그의 작품과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화가의 사람됨(성품)이 마음을 끌었기 때문이다.
<시대공감>은 박수근 평전이다. 기억에 남는 평전이 없는 것을 보니, 내가 누군가의 '평전'을 제대로 읽은 것은 아마도 이 책이 처음이지 싶다. 사람들은 예술가가 불행할수록 더 열광한다고 했던가. 천재화가들의 불행한 삶은 그래서 더욱 예술의 가치를 빛나게 하는 힘이 있다. 박수근이 살아생전에 유명세를 누리며 지금과 같은 평가를 받았다면 어땠을까. 초등학교 공부밖에 하지 못하고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은 적도 없지만, 독학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한 박수근. 주류 화가가 아니었기에 당했던 서러움, 그리고 끝내 불행으로 끝나버린 그의 생애. 그런데 '빨래터'라는 그의 작품이 국내 경매 사상 최고 가격으로 낙찰되었다는 것과, 그것의 위작 논란으로 세상이 떠들썩했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을까.
<시대공감>은 화가 박수근에 대해 에피소드 중심의 단편적 지식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나에게 그의 전생애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새롭게 알았고,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 중 하나는 밀레가 그린 <만종>과 마주치고 후 밀레와 같이 훌륭한 화가가 되기를 기도한 소년 박수근의 모습이었다. "밀레는 '내가 그리는 사람들은 저마다 그들이 맡은 일에 몸을 바치고 있는 식으로, 또한 그들이 뭔가 다른 것이 되어 보려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식으로' 표현하고 싶어 했다. 그러므로 밀레의 그림은 현실과 영원의 경계에 멈춘 영원의 시간이었다. 영웅의 신화가 아닌 태초부터 종말까지 흐름을 멈춘 채 묵묵히 그날의 삶을 이어가는 정지된 역사였다. 모든 비극과 희극의 주제를 지워버린 일상과 늘 그대로인 자연을 하나로 통일시킨 단순함과 진지함 그리고 실직함이야말로 밀레의 위대함이요 아름다움이다"(34). 소년 박수근은 밀레의 세계로 거침없이 빠져들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허리를 반듯이 펴고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러한 연출에 숨은 의도가 있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등장하는 모든 여성들이 허리를 반듯이 펴고 서 있음으로써 땅으로부터 수직의 숭고함을 드러내고 또 고개를 떨어뜨려 고요함을 연출하는 것이다. (...) 박수근은 밀레가 추구하는 바, 일하는 여성의 숭고함과 고요함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 특성을 재현한 것이다"(67).
<시대공감>은 순박하고 넉넉한 인심을 지녔던 양구순민의 정서가 그의 화폭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말한다. "박수근 눈에 들어온 일하는 여성은 바로 밀레의 여인이었고 또 언제나 곁에서 자신을 보살펴 주시던 어머니였으며, 문 열고 나가면 온 마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조선의 아주머니들이었다. 그 여인, 여성, 아주머니들는 롤랑이 지적했듯이 '소박하고 고독한 기도자'였으며, 고흐가 말했듯이 '가장 순수한 인간이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다"(68). 그는 고향의 자연 풍광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절박한 사람들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자 했다. 박수근은 문 열고 나가면 온 마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여인들의 모습, 가장 일상적인 생활이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박수근의 그림은 한국스러운 소재, 주제로부터 벗어난 적이 없었다. "지방색 및 풍토색을 낙후한 것들의 증표라고 생각했던 시절에도 박수근은 초가집과 절구질하는 한복 입은 여성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나물 캐거나 빨래터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여성 또는 아이 업고 장보러 가는 아낙네가 현대 도시풍속으로부터 뒤떨어진 과거 농촌풍속이며 후진성의 상징이라고 해도 박수근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177).
박수근의 그림에서는 게으른 기색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아이를 업고 선 소녀건, 옹기종기 모여 들러앉은 사람이건, "심지어 앉아서 쉬고 있는 듯한 노인에게서조차 나태함을 찾을 길이 없다. (...) 일상 속에서도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고 휴식을 취하면서도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들이다"(246). 그가 당시에 화폭에 담아낸 한국적 정서를 담은 소재들은 당시의 어떤 화가도 소재로 삼지 않았던 것들이다. 그런 그의 작품은 이제 시대의 초상을 담은 세기의 작품이 되었다.
<시대공감>은 풍부한 도판과 함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목소리로 박수근의 생애를 이야기한다. 약간의 추측도 포함되어 있지만 객관적인 목소리로 박수근의 생애를 충실하게 따라가며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극적인 요소는 없지만 박수근의 생애와 그의 작품 세계를 더 잘 알 수 있어 좋았다. 박수근, 알면 알수록 존경하게 되는 화가이다!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