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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잠들기 전에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6-1 ㅣ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6
S. J. 왓슨 지음, 김하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7월
평점 :
"나는 매일 아침 눈뜰 때마다 1953년인 줄 아는 사람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낯선 집 욕실 거울을 보며 거울에 비친 자신이 10대 소녀가 아니라 중년 여자임을 알게 된 여자, 낯선 집이 자기 집임을 알게 된 정신병자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섬뜩함에 사로잡혔다"(423, 작가의 말 중에서).
기억상실증을 소재로한 작품은 많다. 그러나 "하루만 지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순간순간 기억상실증 환자가 경험하는 혼란과 두려움과 슬픔을 깊이 있게 묘사한 작품은 많지 않다. 기억이 하루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나 <첫키스만 50번째>와 닮아 있다. 그 지속되지 않는 '기억'을 중심으로 미스테리를 구성하고 풀어가는 방식은 <메멘토>를 닮았다.
"기억 상실이 사람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 경험을 불러내는 능력이 자아 감각에 얼마나 중요한지, 자신의 과거를 알지 못하고 시간에 붙들려 있는 것이 얼마나 곤혹스러운 일인지 알고 거듭 충격을 받았다"(424, 작가의 말 중에서).
<내가 잠들기 전에>는 '기억'을 '잃어버림'으로써, 그것이 정체성과 자아감각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오늘' 나는 살아있지만, '어제'를 산 기억이 없다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싶은 지독한 순간의 기억마저, 현재의 나를 있게 하는 토대가 된다는 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크리스틴(크리스)은 낯선 방, 낯선 사람 옆에서 잠을 깬다. 주름진 자신의 손을 발견하고 숨이 턱 막히고, 거울 속 얼굴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질식할 듯한 헐떡임이 튀어나온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눈물을 흘리며 "어떻게 된 거예요? 당신 누구예요?"라고 묻는 크리스에게 낯선 남자는 말한다. "당신의 남편이야"(16).
크리스는 자신이 지금 마흔일곱 살이며, 스물아홉 살에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는다. 그녀는 기억상실증 환자이다. 그것도 희귀한 유형의 기억상실증 환자이다(37-39). 일반적으로 기억상실증 환자는 과거의 일들을 불러내지 못한다. 희귀한 다른 유형은 기억을 단기 저장고에서 장기 저장고로 옮기지 못하는 경우이다. 이런 사람은 순간을 산다. 그런데 크리스는 이 두 가지 유형에 모두 해당한다. 스물네 시간까지는 기억하다가 잠을 자고 나면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어제까지의 일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크리스. 그런 그녀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의 남편이면서 동시에 낯선 사람인 '벤'뿐이다. "그럴 테지. 알고 있어. 하지만 걱정 마, 크리스. 내가 돌봐줄게. 늘 돌봐줄게. 당신은 나을 거야. 날 믿어"(18).
그리고 크리스를 도와주려는 또 한 남자가 있다. 닥터 '내시'는 크리스가 그의 권유에 따라 지난 몇 주 동안 일기를 적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것은 일종의 실험이다. 크리스는 자신이 적어나간 일기를 통해 조금씩 기억을 재생해 나간다. 그런데 크리스는 자신이 언제 적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일기장의 첫 페이지에서 예기치 않은 말, 끔찍한 말을 발견한다.
"벤을 믿지 마라"(44).
"일기는 내가 누군지, 어떻게 여기 왔는지,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말해주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내 기억들이 천천히 되살아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196).
남편 몰래 닥터 내시의 도움을 받으며 일기장을 통해 기억을 재생해나가는 크리스는 남편 '벤'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벤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데, 벤은 왜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그녀의 사고에 대해, 그녀의 아들에 대해, 남편은 왜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남편 벤이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일까? 그녀에게 고통과 슬픔이 되는 기억은 말해주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이런 것들을 기억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면 나는 덜 슬플 거이고, 그는 그런 기억을 떠오르게 해주는 고통을 덜 것이다. 그는 분명 입을 다물고 싶어 했을 것이다. 내가 언제 어디서나 작은 폭탄 같은 이런 기억의 파편들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알고, 아무 때고 누군가 그 기억의 표면을 찌를 때마다 내가 고통을 겪는 것을 알면, 그의 삶은 분명 힘들 것이다"(149).
그러나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또다른 고통을 안겨주지 않기 위해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
'내일이라니? 내겐 내일이 없어.' 어제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159).
기억을 잃어버린 크리스는 순간순간 떠오르는 장면과 감각마저 그것이 기억이 아니라 상상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게다가 그녀의 기억은 조작되기 쉽다. 지금 그녀가 의존하고 있는 일기도, 그녀의 삶에 대해 그녀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기억하고 있는) 남편 벤, 닥터 내시, 친구 클레어의 증언도 누구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다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기억을 잃어버린 그녀의 인생은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 심지어 아직 살지 않은 '내일'의 삶까지!
기억을 잃어버린 그녀는 무엇으로 자신의 인생에 벌어진 진실과 꾸며낸 거짓을 가려낼 수 있을까?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곧 잠들 것이고 그러면 내 뇌는 모든 것을 지우기 시작할 것이다. 내일 모든 것을 다시 경험할 것이다. 이제는 거창한 꿈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라는 것이라곤 정상적으로 느끼는 것뿐이었다. 여느 사람들처럼 사는 것, 경험을 토대로 경험을 쌓아가는 것, 하루를 바탕으로 다음 날을 이어가는 것뿐이었다(185).
<내가 잠들기 전에>가 등장과 함께 베스트셀러를 석권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마지막 몇 장을 통해 일어나는 반전의 "끔찍함" 때문이리라.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의 심리 묘사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독자라면, 이 마지막 몇 장을 읽기 위해 지루함을 견뎌야 한다. 앞부분이 늘어질수록 마지막 몇 장이 더욱 끔찍해지는, 뒤통수를 후려치는 '스릴러'의 묘미가 있다.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낯선 상황에서 진실을 찾아가는 주인공(크리스)이 순간순간 마주하게 되는 공포와 불안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반전이 더욱 끔찍해질테니 말이다. 진정한 공포는 절대 다시 재생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기억이 아니라, 조작된 현재의 삶이다!
<내가 잠들기 전에>는 '기억'이라는 것이 오늘 내 삶을 지탱하는 데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얼마나 큰 힘을 가진 것인지 생각하게 해준다. "나는 견고한 땅을 갈망한다. 생생한 것, 잠든 사이에 사라져버리지 않는 것을 갈망한다. 나 자신을 단단히 붙들어야 해"(258).
집안의 반대로 사랑을 이루지 못한 연인이 있었다. 둘은 몹시 괴로워했다. 그런데 어느 날, 여자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사고 이후, 그 남자'만'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얼마나 괴로웠으면, 얼마나 잊고 싶었으면, 다른 것은 다 기억하면서도 '그 남자'만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하며 안타까워했다.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사실에 더 슬퍼했다. 이 드라마같은 이야기는 은사님께 전해들은 실화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괴로웠던 그 여자는 그 남자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후, 덜 불행했을까?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까맣게 잊고 싶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내가 잠들기 전에>는 '나'라는 사람을 이루는 정체성, 자아감각은 '그 모든' 기억을 포함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크리스가 기억을 대신해 적어내려간 일기가 그녀가 누구인지, 어떻게 여기 왔는지, 무엇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말해준 것처럼, 나의 기억이, 지나온 세월 동안 함께하며 누군가와 공유하고 있는 기억이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여기 왔는지, 무엇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설명해준다. 어쩌면 '기억'이라는 것이 동물과 인간을 나누는 가름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끔찍한 기억 때문에 괴로운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라. 그 기억마저 내 것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 것이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