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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미친 바보 - 이덕무 산문집, 개정판
이덕무 지음, 권정원 옮김, 김영진 그림 / 미다스북스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책에 미친 바보에게 빠져들다!
그는 손에서 책을 놓아본 적이 없다. 그의 방은 매우 작았지만 동, 서, 남 삼면에 창이 있어 동에서 서쪽으로 해 가는 방향을 따라 빛을 받아가며 책을 읽었다. 그가 웃으면 집안 사람들은 누구나 그가 기이한 책을 얻은 줄 알았다. 평생을 독서로 일관했던 사람, 만약 덥지도 춥지도 않고 배고프지도 배부르지도 않고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평화롭다면 무엇을 할까 물으면 책을 아니 읽을 수 없다고 대답하는 사람, 문장에 꾸미지 않는 진정을 담는 것을 가장 중요시한 사람, 인간의 도리 중 가장 당연한 일이 바로 배우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던 사람, 스스로를 세상 물정 모르고 책만 보는 바보로 여겼던 사람, 한 겨울 칼바람에 <한서>를 이불 삼고 <논어>을 병풍 삼아 살았던 사람, 이 사람의 이름은 이덕무이다.
무너질 듯한 집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할 정도였고 변변치 않은 음식조차 자주 때를 걸렀지만, 책만 있으면 행복했던 이 남자에게 자꾸만 빠져든다. 우리는 왜 이 '책에 미친 바보'를 좋아하는 것일까? 좋아하는 것에는 병이라고 할만큼 광적이고, 생활면에서는 무능한 가장이라 할만큼 무책임한 면도 없지 않다. 요즘 세상에 이런 남자가 있다면 한심하게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책에 미친 바보>는 이덕무의 글을 직접 읽어볼 수 있는 기회이다. 지금과 쓰는 글이 달라 '번역'의 작업을 거쳤지만, 그와 직접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앉은 듯한 생생함이 있다. 그가 쓴 '자화상'에서는 자신을 과장하지도 비하하지도 않는 솔직한 마음을 엿볼 수 있고, '내가 책을 읽는 이유'에서는 이덕무의 독서법을 배울 수 있다. 그가 아주 체계적으로 책을 읽었음을 알 수 있다. '문장과 학풍에 대하여'에서는 문장에 꾸미지 않는 진정을 담는 것을 가장 중요시한 그의 문학관 고증적인 학문적 성향을 읽을 수 있고, '벗, 그리고 벗들과의 대화'에서는 그가 보낸 편지글을 통해 부럽기만 한 깊은 우정과 함께 이덕무의 소소한 일상과 개구진 면모도 발견할 수 있다. 세 번이나 단 것을 먹으면서도 단 것을 무척 좋아하는 자신에게는 하나도 주지 않은 박제가를 나무라 달라고 '이서구에게' 보낸 편지를 읽고는 한참을 웃었다(157-158). '군자와 선비의 도리'에서는 이덕무라는 사람의 됨됨이를 엿볼 수 있다. 그가 왜 소설 배척론자로 알려졌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고, '사랑하는 누이를 보내며' 쓴 글에는 애절한 슬픔이 담겨 있다. '자연과 벗을 삼아'에서는 이덕무의 산문 솜씨를 엿볼 수 있는 멋드러진 에세이를 통해 그의 소박한 일상에 다가갈 수 있다.
소설을 무척 좋아하는 나에게는 그가 소설을 배척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는데, 그렇다고 그가 모든 소설을 배척한 것은 아니다. 이덕무가 배척한 소설은 <삼국지연의> 같은 부류이다. "이것은 음탕함과 도둑질을 가르치고, 인륜과 교화를 해치는 매체이니 왕정에서는 엄격히 금지되어야 하네. 그런 고로 우리가 매우 싫어하고 깊이 배척하는 것"(169)이라고 이유를 밝힌다. 좀더 구체적인 의견은 이렇다. "소설에는 세 가지 미혹된 것이 있다. 헛것을 내세우고, 빈것을 억지로 맞추려 하고, 귀신을 말하고 꿈을 말했으니, 지은 사람이 첫 번째 미혹된 것이다. 허왕된 것을 감싸고 천한 것을 고취시켰으니, 논평한 사람이 두 번째 미혹된 것이다.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경전을 등한시했으니, 탐독하는 사람이 세 번째 미혹된 것이다. (...) 더욱 심한 자는 음란하고 더러운 일을 늘어놓고 말도 안 되는 설을 부연하여 독자들을 기쁘게 하는 데만 힘쓰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189). 요즘으로 치면 자극적이기만 한 상업적 소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책에 미친 바보>는 '이덕무'에게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 더 재밌을 책이다. 옮긴이의 해설이 붙어있긴 하지만, 그의 글을 바탕으로 이덕무라는 사람을 입체적으로 조명해보는 일은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나도 지인을 통해 '이덕무'라는 사람의 매력에 먼저 끌리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큰 흥미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책에 미친 바보>를 읽는 내내, 해가 드는 쪽으로 몸을 돌려가며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덕무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책을 읽는 순수한 즐거움을 사랑하고 맑고 진실한 선비의 마음으로 청렴하게 일생을 보낸 책에 미친 바보 이덕무. 책을 읽는 것마저 경쟁이 되고, 자랑이 되고, 욕심이 되어버린 세상이라 그의 순수함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