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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의 감옥 - 시대와 사람, 삶에 대한 우리의 기록
이건범 지음 / 상상너머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서울대학교와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는 여고를 다녔다. 새학기가 시작되고 하루가 멀다 하고 날아드는 체류탄 가스 때문에 매점의 휴지는 자주 동이 났고, 단축수업을 하는 날도 많았다. 지리적 여건 때문에(신림역과 서울대입구역을 봉쇄하고 관악산으로 토끼몰이를 하면 꼼짝없이 갇힌단다) 서울대학교에서는 데모를 잘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1987년은 달랐다. 그날도 데모가 있었다. 단축수업 발표가 있었고, 친구들과 시내에 나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그런데 이상했다. 체류탄이나 화염병이 날아다니지도 않는데 묘하게 분위기가 무거웠다. 서울대학교 앞 거리, 언니, 오빠들이 마스크를 쓰고 고개를 숙인채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침묵시위라고 했다. 그런데 그들과 대치한 전경대 앞쪽에 한 아주머니가 확성기를 들고 서 계셨다. 데모대를 진압하려는 사람들에게 끌려왔는지, 모셔져왔는지, 그 어머니는 "아들아, 돌아오라"고 눈물로 호소하셨다. 이 현실감 없는 풍경은 뭐지 하는 순간 모든 소음이 사라지면서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 기묘한 정적 속으로 잠겨드는 듯했다. 어머니의 호소에 고개를 떨구고 있는 청춘을 바라보며, 나는 물었었다. '저들을 저기 저 자리에 서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내 청춘의 감옥>은 그때 그 자리로, 그 물음의 자리로 나를 다시 데려다주었다.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이란 그 시대에는 없었다. 내가 '살아야 할 삶'만이 있었다. 숨죽이며 후일을 도모할 것인가, 주어진 대로 살 것인가, 불의에 맞서 싸우며 살 것인가? 답도 없는 고민을 1년 넘게 끌다가 나는 결국 민주화 운동에 인생을 걸기로 결심했다. 그러고는 10년 동안 그 길에 남았다"(230).
<내 청춘의 감옥>은 그렇게 10년 동안 민주화 운동의 길을 걸었던 '서울대생 오빠'가 경험했던 징역살이 이야기이다. 청춘을 민주화 운동으로 보내고, 창업을 하고, 승승장구를 하고, 졸딱 망하고,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병으로 시각장애 1급이 되고, 지금은 인문사회과학 출판기획자로 일하며 결코 '평범하다' 할 수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저자는 20대에 두 차례 옥살이를 했던 것이 "인생을 헤쳐 오는 데에 가장 소중한 깨달음을 준 경험"이었다고 고백한다. "고통의 무게감보다는 웃음의 가벼움이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원동력임을 역설적이지만 감옥에서 배웠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징역살이 이야기는 특별하다!
<내 청춘의 감옥>을 이끌어가는 코드는 '유머'이다. "생명의 힘이란 그렇다. 인간 역시 어느 조건에서든 자신의 삶을 비출 한줄기 빛을 발견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필자 빅터 프랭클 박사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견뎌 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나치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견한 무기는 다름 아닌 '유머'였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처럼 '힘들수록 웃음을 찾으라'는 건 고통의 나락에 떨어진 사람들이 섬광처럼 발견하는 삶의 지혜인가 보다. "나 역시 징역의 칙칙함을 깨기 위해 웃음을 찾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다"(105). 가둔 자들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삶의 무게를, 고통의 무게를 '가볍게' 웃어넘긴다. 갇힌 공간 안의 답답함에 또다시 자신을 구속하지 않고, 공간의 자유가 사라진 그곳에서 시간의 탄생을 목격하고 시간의 여유를 즐긴다. 가진 것은 시간뿐이요, 일상의 편리함이 통제된 환경에 지혜를 보태니 징역살이의 불편함은 오히려 놀이가 된다.
"세상이 달라지는데 '자율적이고 충만한 개인'이 얼마나 중요한 전제 조건인가를 고민하면서부터 나는 철의 규율로 단련된 혁명 조직 그리고 그 조직이 주도하는 폭력 혁명과 헤어져야 했다. 아니, 그렇게 혁명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입장으로 변했다. 개인의 내면세계를 일구고, 더디더라도 민주주의를 거쳐 최대한의 공통분모를 만드는 게 앞으로 내가 우리 사회를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이라고 보았다. 그럼으로써 나는 '이념'의 포승줄에서 풀려나 '나'에게로 돌아왔다"(215).
"학생 운동이나 노동 운동을 한다는 건 '자기 인생을 거는 결단'을 전제로 삼는 행위"였던 그때 그 시절, 버스를 타면 '이상'을 이야기하는 언니 오빠들이 많았다. 지금은 버스를 타면 '성공'과 '놀이'를 이야기하는 청춘들이 많다. 나도 한때 이상을 꿈꾸었고 타인의 고통을 목도하며 괴로워하던 시절도 있었으나, 이상하게 이상을 꿈꿀수록 오히려 지독한 현실주의자가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또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문제에는 악착을 떨며 비장하게 맞서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는 가볍게 무시하는 사회를 보면, 우리가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굴곡 없는 인생 없고 고민 없는 청춘 없겠지만, 시대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자신을 내던지며 들끓었던 시대 안에 갇힌 한 청춘의 이야기는 그대로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엉뚱한(?) 지혜를 하나 우리에게 남겨준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미처 알지 못했던 감옥살이의 그 명령한 즐거움(?)에서 나는 인생의 파도를 넘어가는 유연한 방법을 하나 배웠다. 비장하게 맞서는 것만이 진지한 자세는 아니라는 것을. 이왕 넘어야 할 산이라면, 어차피 걸어야 할 길이라면, 삶의 무게가 나를 짓눌러도 즐겁게 걸어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재밌게 읽었고, 잃어버린 질문을 찾았다. 이제 다시 울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