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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론드 1
조이스 캐럴 오츠 지음, 강성희.송기철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수줍음 많고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던 노마 진은 다른 어른들, 특히 남자들이 자신의 어머니인 이 여자를 관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게 좋았다. 그들이 글래디스의 불안한 웃음과 끊임없이 움직이는 손 때문에 달아나지만 않았어도 어머니 당신을 사랑해줄 남자를 찾았을 텐데. 당신과 결혼해줄 남자를 찾았을 텐데. 그러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었을 텐데!"(99)
거침 없는 묘사, 불쑥 불쑥 튀어 나오는 내면의 목소리.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호흡을 고르며 생각할 새도 없이. '신들린 듯하다'라는 표현이 이 보다 더 잘 어울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쏟아지는 흐름을 따라가며 가끔 김수현 선생님을 떠올리기도 했다. 김수현 선생님 식의 '리얼'에 감탄해마지 않는 독자로서 이 책의 '리얼'함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책은 '리얼'은 '리얼'인데 전혀 다른 감각의 '리얼'을 보여준다. 강렬한 문장, 잠시도 틈을 주지 않는 흡입력! 그러나 엄청난 집중력을 요한다. 이런 글은 전에 만나본 적이 없으므로.
"죽음은 암갈색으로 사그라지는 빛 속에서 대로를 따라 돌진하며 등장했다"(15). 이후 이어지는 죽음에 대한 묘사들. "결코 틀림없는 죽음이 등장했다. 흔들림 없는 죽음. 다급한 죽음. 맹렬히 페달을 밟는 죽음. +특급 우편, 취급 주의+라고 표시된 소포를 안장 뒤 철제 바구니에 실어 나르는 죽음. (...) 정말이지 잽싼 죽음! 경적이나 울려대는 중년들에게 콧대를 내흔드는 죽음. 엿이나 쳐먹어라 꼰대들! 그리고 당신도 말이야. 비웃는 죽음. 마치 값비싼 신형 차들의 번쩍번쩍한 차체 옆을 날아가듯 지나치는 버스 버니처럼." 이것이 마릴린 먼로의 이야기라는 것을 몰랐다면, 마릴린 먼로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면 프롤로그에서부터 길을 잃을 뻔했다. "죽음은 다시 한 번, 더 세게 벨을 울렸다. 그리고 이번엔 문이 열렸다. 나는 죽음으로부터 그 선물을 건네받았다.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누가 그것을 보냈는지도. 나는 이름과 주소를 보며 웃음을 터뜨리고선 망설임 없이 서명했다"(18). (색깔이 다른 부분은 내면의 목소리이다.)
프롤로그만으로도 아마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도대체 이 작가 뭐지?" 예사롭지 않은, 생경한 문장에 당황한 나는 프롤로그를 읽다 말고 대충 읽고 넘겼던 작가 프로필부터 다시 보았다. 조이스 캐럴 오츠. 처음 들어본 이름인데 그녀는 거장이었다. "살아있는 미국의 작가들 중 가장 뛰어난 작가 중 한 명이자, 최고의 여성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왜이리 낯선 이름일까. 나에게만 그런 것일까. 좀 더 알고 싶어 검색을 해보기도 했다.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그 작품들은 가장 권위 있는 상의 후보작으로 거론되고, 2004년 무렵부터는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빠지지 않고 거론되고 있단다. 프롤로그만으로 나를 당황시켰던 <블론드>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아직도 그녀(마릴린 먼로)에게서 더 건져낼 이야깃거리가 남았을까 싶을 만큼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던 것이다.
<블론드>는 마릴린 먼로(노마 진 베이커)라는 희대의 섹시 아이콘의 삶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이다. 그러나 마릴린 먼로의 이야기이지만, 그녀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저자는 작가의 말을 통해 "<블론드>는 '실제의 삶'을 바탕으로 구성해낸 작품이며, 기본적으로 작품 전반에 걸쳐 제유법을 적용했다. 가령, 어린 노마 진은 수많은 수양 가정을 전전하며 살았지만 <블론드>에서는 허구의 한 곳만을 다루고 있다. 그녀의 수많은 여인들과 의학적 위기, 낙태, 자살 시도, 영화들 또한 작가가 선정한 몇몇 상징적인 사건들로만 대치했다"(6)고 밝힌다. 마릴린 먼로의 생애가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지만, <블론드>는 역사물이 아니다.
오히려 <블론드>에서 '마릴린 먼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이다.
에로틱. 그건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니까.
광기는 고혹적이고 섹시하니까. 여성의 광기는.
그 광기 어린 여성이 충분히 젊고 매력적이기만 하다면.
"수줍음 많고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던 노마 진은 다른 어른들, 특히 남자들이 자신의 어머니인 이 여자를 관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게 좋았다. 그들이 글래디스의 불안한 웃음과 끊임없이 움직이는 손 때문에 달아나지만 않았어도 어머니 당신을 사랑해줄 남자를 찾았을 텐데. 당신과 결혼해줄 남자를 찾았을 텐데. 그러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었을 텐데!"(99)
"그녀는 웃었고, 웃는 건 아주 쉬웠다. 동화 속 수수께끼. 그녀는 그 수수께끼의 답을 알았다. 난 뭐지? 난 결혼한 여자야. 내가 아닌 건? 처녀. 난 처녀가 아냐"(288).
'최고의 여성 작가'가 살려낸 희대의 섹시 아이콘의 내면의 목소리는, 애처로울 만큼 위태롭다. 여성학자들을 분노하게 할 묘사들. 남성들에게 욕망의 대상으로 '소비되는' 묘사들이 불쾌하고 끔찍할 정도로 '노골적'이다. 에덴 동산의 '하와의 저주'가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불안하고 위태로운 '소녀의 자아'는 어쩌면 아직도 어디선가 구원을 갈망하고 있을 것만 같다.
총3권으로 이루어진 <블론드>의 1권은 '노마 진 베이커'(마릴린 먼로의 본명)의 아이 시절(1932-1938)과 소녀(1942-1947)을 이야기한다. 아직 1권밖에 읽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은 어떤 결론을 내릴 수가 없지만, 독자들의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릴 것이라는 예상은 쉽게 해볼 수 있다. 다른 독자들의 '호불호'가 궁금해진다. "나의 취향은 아니라"는 쪽에 줄을 서게 되더라도 '일단' 읽어볼 가치는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