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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양육 혁명 - 과잉보호와 소비문화에서 아이들을 살리는 젊은 부모들의 반란
톰 호지킨슨 지음, 문은실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부모가 게으를수록 아이가 행복해진다!
독일의 유명한 사회학자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의 책 <가족 이후에 무엇이 오는가?>에 보면 '계획 수립 프로젝트로서의 삶'이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다. 개인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위험한 자유', 현대 사회를 특징짓는 '불확실성의 생산'은 개인에게 "계획하라! 미래를 손아귀에 쥐고 통제하라! 우연을 피하고 심지어 조정하기까지 하라"는 요구를 만들어낸다고 지적한다. 이 요구에 응하면 삶은 계획을 수립하는 프로젝트가 된다는 것이다. 미래에의 압박은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을 만들어낸다.
'계획 수립 프로젝트로서의 삶'에서 한국 사회의 부모가 가장 열렬히 매달리고 있는 바로 '자녀 교육'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입시(교육) 제도 및 각종 사회 제도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선발'하는 방식이다. 잠재하는 위헙과 위협에 대응해야 하는 부모는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을 떠안는다. 여기에 과잉보호와 소비문화가 혼합되면서 한국 사회는 '미친 양육'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을 잃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게 되는 하나의 진실은 아무리 견고한 계획을 수립한다 해도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에 해당하는 사례를 지금 당장이라도 수십 가지, 수백 가지 이상 댈 수 있다. 하나 있는 딸의 멋진 인생을 위해 어릴 때부터 딸을 방송에 출현시키며 부지런을 떨었지만, 결국 딸의 평범한 삶을 받아들여야 했던 이모가 있고. 명문대 출신의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자 고군분투했지만, 과도한 입시 스트레스로 치료를 받아야 했던 친구가 있고. 줄곧 전국 1등을 놓치지 않으며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기적 처럼 대학에 떨어진 후,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일 수 없어 자살을 선택해야 했던 교회 후배가 있고. 일명 '대치동 엄마'로 살아가느라 아픈 엄마 곁을 편히 지킬 수 없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촌 동생이 있다.
<즐거운 양육 혁명>은 한마디로 게으른 부모가 행복하다고 말한다. 아이들을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그들을 놀게 하라는 것이다. 게으른 양육의 최고 핵심 포인트는 자녀와 일을 나누라는 조언일 것이다. 자녀가 할 일을 자녀에게 돌려주라고 말한다.
저자 소개가 재밌는데, 저자인 톰 호지킨슨은 "천성적 게으름과 동기결여로 사회에 부적응하던 중, 게으름뱅이를 단지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정의한 새뮤얼 존슨에게 감명을 받아" 잡지를 창간하고, 다양한 신문과 잡지에 칼럼을 기고하며, 현재는 "영국 데번의 한 농장에서 부인과 세 아이 그리고 말과 토끼, 고양이와 닭과 함께 어우러져 우쿨렐레를 연주하고 글을 쓰며 살고 있다"고 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게으른 양육'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토대도 탄탄하다. 이 책의 저자가 '게으른 양육'을 주장한 최초의 사람은 아니다. 저자는 자신의 양육 경험을 사례로 소개하며, 17세기 존 로크와 18세기의 장 자크 루소의 사상으로 자신의 주장을 검증한다. 이 밖에도 "20세기 초반의 자유주의자 D. H. 로렌스, 1960년대 교육 사상가이자 서머힐 스쿨의 창립자인 A. S. 닐, 새로운 교육 제도의 실현을 주장한 이반 일리치, '고립된 개인'의 시대를 넘어설 것을 촉구한 바바라 에린라이히 등을 끌어와서 이야기를 풀어간다"(12).
<즐거운 양육 혁명>은 우리 사회의 '미친 양육'을 강력하게 한방 먹이는 책이다. '부모 노릇'에 지친 부모라면 탈출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게으른 양육'은 무엇보다 부모의 내면에서 분노가 폭발하는 것을 막아준다. 부모가 행복해야 자녀도 행복할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어릴 때, 친구들과 어울려 노느라 제대로 된 특기 하나 만들어놓지 못했던 나는, 누가 물으면 우리 부모님은 나를 '방목'하셨다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지혜였음을 깨닫는다. 그런데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게으른 양육과 무책임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을 놀게 내버려두는 것'과 방치는 전혀 다른 것이다. 저자는 "게으른 부모가 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자유의 탐닉과 훈육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것"(49)이라고 말한다. "게으른 부모의 사명은 훈육을 그르치는 것을 피하면서 아이들을 놀게 내버려두는 것"인데, 이것이 "현대의 양육에서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인 떼쓰기를 중지시켜 줄 것"이라고 장담한다. 여기서 저자는 아이들이 징징대는 이유를 분석하며 해결 방안을 제시하며, 과잉보호하며 소비문화에 젖어 있는 부모들에게 중요한 인사이트를 제공해준다.
과도한 부모 노릇에서 벗어난 게으른 부모가 되라는 말에 자유를 맛보며, 쉽게 '혹' 할 부모들도 많겠지만, 아쉽게도 게으른 부모가 되는 길은 쉽지만은 않다. 돈이 많이 드는 여행을 그만두라는 말은 고맙지만, 부모는 집안에서도 얼마든지 즐겁게 놀 수 있는 '창의적인' 놀이 계발자가 되어야 한다(물론 설거지도 얼마든지 즐거운 놀이가 될 수 있다는 깨알 같은 조언들이 책에 가득하지만 말이다). 비싼 장난감 대신 친구를 곁에 두라는 말도 고맙지만, 현대 사회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도 결코 쉽지만은 않은 과제이다.
<즐거운 양육 혁명>은 쉽게 적용할 수 있는 교육 지침서가 아니다. 게으른 양육은 가치관의 문제이다.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 인생의 목표, 양육 마인드가 뒤집어지는 '혁명'이 없이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세상 풍조를 거스를 수 있는 신념이 절대적으로 요청되기 때문이다. 물건을 사달라고 조르는 자녀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하며, 값비싼 학원과 캠프를 다니며 스펙을 쌓아가는 다른 아이들을 보아도 내 아이만 뒤치지는 것 같은 불안 따위는 치워버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야 자녀가 성공할 수 있다"는 마인드로 <즐거운 양육 혁명>에 접근한다면, 모순의 덫에 빠져 들게 될 것이다. 횽내 내기도 어렵겠지만, 더 깊은 후회만 남기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덧붙이고 싶다. <즐거운 양육 혁명>은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대신 '시간제'로 일하며 아이들과 놀아주라는, 다소 극단적인(이상적인 생각을 뛰어넘어) '게으름'(?)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가능해보일지라도, '입시제도'만 바뀌면 부모, 자녀 모두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근시안적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작은 움직임일지라도 '미친 양육'에 대한 반란이 꿈틀거릴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