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의 재발견
제임스 패커 지음, 장인식 옮김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거룩함은 영성과 도덕성이란 두 기둥에 놓인 아치와 같아서, 두 기둥 중 어느 하나가 가라앉으면 나머지 하나도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다"(143-144).



오늘날에도 거룩함이 중요한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전 세계적인 영적 각성을 불러일으켰던 제임스 패커가 오늘 우리의 삶에 도전하는 질문이다. 그는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이 거룩함을 이미 한물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46)고 진단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의 거룩함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내 속 생각을 들킨 것 같아 찔끔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싶은 열망으로 뜨거웠을 때, 내 앞을 가로막는 높은 장벽이 있었다.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지만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야"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말씀, 도저히 넘을 수 없다 생각했던 태산, 그것은 바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는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돌이켜 보니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높은 수준의 '거룩함'에 도달하려는 계획이 애초에 내게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거룩하게 살려는 시도는 수도원 시절에나 가능한 것이라 치부하는 교만하고 어리석고 게으른 생각이 내 안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거룩의 재발견>은 스케일이 큰 책이다. '거룩함'에 관한 부분적인 견해들이 아니라,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전체를 조망하듯 '거룩함'을 조망한다. 역사적 줄기를 따라 신앙의 전통을 추적하는 날줄과 현대 사회를 분석하는 씨줄이 교차하며 신앙인들이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거룩함'에 관한 진리와 그 본질을 재발견해내고 있다. 제임스 패커는 이 탐구 과정을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성결학교'라 이름 붙이고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성경학교'라 이름 붙이는 이유는 첫째, 기도와 마찬가지로 거룩함에 대해서도 경험 속에서 배워야 하기 때문이고(18), 둘째, 성결케 되는 법을 배우는 일은 학교에서 교육받는 과정과 유사하며(19), 셋째, 주인과 종, 지도자와 추종자,교사와 학생의 관계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는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께서 모든 관계를 조정하시기 때문이다(21). 다시 말해, 거룩이란 삶에서 배우고 익혀야 할 분명한 과제이며, 피할 수 없는 도전이며, 반드시 도달해야 할 목표임을 깨우쳐준다.

<거룩의 재발견>은 성경 말씀은 물론, 우리가 구시대의 유물 정도로 취급하는 신앙의 전통 속에서도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 유산을 다시 찾아준다. 한 예로, 인간의 죄성과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던 청교도들의 엄격한 태도를 다시 돌아보며 교훈을 되새긴다(171). 요즘 신앙 서적은 성경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감각적인 글이 많기 때문에, 제임스 패커의 <거룩한 재발견>은 고지식해보이는 일면도 있다. '거룩'에 대한 그의 고집이 현대 사회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크리스천에게는 다소 지루하고 버거운 과제로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제임스 패커가 딛고 서 있는 신앙의 전통이야말로 복음의 정통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쩜 우리는 이것을 애써 잊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거룩에 대한 제임스 패커의 고집이 다소 고지식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교훈이 우리의 양심과 잠든 영혼에 깊이 파고들 수 있는 이유는, 현대 사회를 통찰하는 예리한 칼날이 우리가 숨어들 곳이 없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요즈음 그리스도인들이 주로 설교하고 가르치는 내용은 어떤 것인가? 텔레비전이나 DVD를 통해 어떤 내용이 전달되는가? 거룩함보다 성공이나 긍정적 사고일 것이다"라는 그의 외침이 우리의 양심을 찌른다. "현대 문화는 오만한 낙관주의와 경박한 비관주의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오만한 낙관주의는 사람들을 부추겨 자신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하고 과신하게 만든다. 반면 경박한 비관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은 물론 자신의 삶까지 가급적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는 그의 분석이 시대를 보는 눈을 뜨게 해준다.

<거룩의 재발견>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거룩한 생활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다는 생각을 파기해버린다. "성경 속에서 말하는 거룩함이란 분명히 '세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하나님께서 보시는 거룩함의 본질이라는 점이다"(42). 거룩을 사생활의 차원에서 '나만의 문제'로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무지한 생각이었는지 절실히 깨닫는다. 또 하나 <거룩의 재발견>을 통해 특별히 개인적으로 가슴 싶이 새겨지는 영적 교훈은 '위로 성장하기 위해 아래로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래로' 자람으로써, 즉 비천하게 낮아짐으로써 예수님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위로' 성장한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188).

"오늘날에도 거룩함이 중요한가?" 당연히 그렇다. 그러나 <거룩의 재발견>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거룩한 생활은 쉬운 과제가 아니다. 성령님이 도와주시지만, 우리가 도달해야 할 거룩함의 표준은 최고 수준의 것이며, 거룩한 삶이란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의 업적이 아닐지라도 '그리스도가 소유하던 덕을 모방하는 삶'(44)까지 자라가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최고의 표적과 기사는 언제나 신자들의 변화된 삶이어야 한다"(318).

그러나 동시에 <거룩의 재발견>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거룩한 생활은 무거운 짐이 아니다. 거룩함이란 사랑에 의해 작동되는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거룩함의 뿌리는 언제나 성령님께서 재촉하시는 충동이고, 이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옳은 일을 행함으로써 사랑을 보여주는 단계로 마무리 된다"(165). 

바로 여기에 거룩함의 역설이 존재한다. "신자들이 추구하는 거룩한 삶과 관련하여 한 가지 역설적인 진리는, 거룩한 삶이란 본질적으로 행복의 연속이라는 점이다"(136). <거룩의 재발견>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도전이지만, 동시에 거룩한 열망과 기대감으로 우리의 영혼을 채운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 가운데 살 수밖에 없던 우리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표준은 역설적이게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다시 말해 최고 수준이라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흥분되지 않은가! 이 책은 영적 목마름을 불러 일으킨다. "예수님, 목마릅니다. 오셔서 채워주소서" 외치며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 거룩함에 대한 목마름!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과 도덕성 때문에 기독교 안티를 양산해내고 있는 이 시점에서 <거룩의 재발견>은 귀 있는 성도들이 반드시 들어야 할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요, 시대적인 사명라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