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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마지막 장미
온다 리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0년 10월
평점 :
미묘한 변화를 주면서 되풀이 되는 하나의 주제, 살인 사건의 변주곡!
이 살인 사건은 진실인가, 환상인가.
한국에서도 두터온 독자층을 형성하는 '온다 리쿠'의 명성이 자자하지만, 이 작품에 대한 호불호는 극명하게 갈리는 듯 하다. 결말 때문에 시청자들의 원성이 자자했던 '파리의 연상'이 연상된다. 두 연인의 결말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던 시청자들은 모든 것이 여주인공의 소설 속 설정이었다는 결말에 황당해했다. 무엇인가 색다른 결말을 시도하고 싶었던 작가들의 파격적인 설정이었지만, 오히려 시청자들에게 허탈감만 안겨주었을 뿐이다. <여름의 마지막 장미>도 '온다 리쿠 최고의 판타스틱 미스터리'라고 하지만, '미스터리'의 발단이 되는 살인 사건이 누군가의 생각 속에서 이루어진 가상 현실이라고 한다면?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는 일이 혼재하는 문학적인 기법이 신선한 묘미를 준다고 해도,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미스터리에 몰입하기에는 다소 흥미가 떨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이 책이 어땠는지 묻는다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고 대답하겠지만, 일면 허탈할 수도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여름의 마지막 장미>는 주제 선율을 유지하며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변주곡'을 연상시킨다. "주제, 제1변주, 제2변주, 제3변주, 제4변주, 제5변주, 제6변주", 이것이 이 책의 목차이다. 각각의 변주마다 화자가 바뀌고, 한 변주가 끝날 때마다 조금씩 상황이 달라지며 다른 살인 사건(또는 자살)이 일어난다. <여름의 마지막 장미>가 품고 있는 '미스터리'는 그 사건 자체에 초점이 있다기보다,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의 숨겨진 사연이 더욱 궁금증을 자아낸다. 차라리 인물들의 숨겨진 사연을 배경으로 하여 독자들과 어떤 살인 사건이 진실이고, 어떤 살인 사건이 환상인가 하는 것을 알아맞추는 게임을 벌였다면 훨씬 더 흥미롭지 않았을까.
"전부. 그거 그녀들의 게임이야. 셋만 참가하는, 그녀들 사이에서만 성립하는 게임. 내내 그랬어, 그 세 사람. 그런 이야기를 진짜로 받아들이면 안 돼. 그 얘기들 가운데 과연 뭐가 진짜일지"(46).
외진 곳에 홀로 서있는 고풍스러운 호텔. '사와타리 그룹'의 세 자매는 매년 늦가을이면 그곳으로 손님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연다. 그런데 그녀들에게는 지어낸 이야기를 하는 습관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그 같은 게임을 계속한 듯하다. 한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다른 자매가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녀들은 그런 게임을 벌일 때마다 비참하고 괴기스러운 경향의 결말을 즐겼지만, 관객이 되어 세 자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손님들은 경악한다. 그녀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이런 게임을 즐기게 되었을까.
"진실은 허구 속에. 진실은 거짓말 속에. 진실은 농담 속에. 지금 그녀는 진실을 허구 속에 담아 이야기하려 하고 있다"(261).
세 자매가 즐기는 이 기묘한 유희 속에는 사실과 거짓이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다. "거짓을 사실처럼 잘 꾸며 내려면 사실을 어느 정도 적절하게 섞는 것이 핵심이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보다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색깔을 입히는 쪽이 얘기하기가 쉽다. 상대를 믿게 하려면, 자잘한 사실을 쌓아 올려 목적지인 거짓으로 유도해야 한다"(48). 세 자매가 공개적으로 이런 게임을 벌이는 목적은 무엇일까. 어디까지가 지어낸 거짓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모를 기묘한 이야기가 호텔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그곳에 가득차 있는 '악의'를 느끼기 시작한다. 거짓과 진실, 과거와 현재, 기억과 실제가 함께 녹아들며, 초대되어 온 손님들의 얽히고 섥힌 관계가 점차 그 속살을 드러낸다. "거짓말은 무언가를 은폐하기 위해 하는 경우가 많다. 그녀들은 과연 무엇을 은폐하려는 것일까"(48).
이 책에는 중간 중간 영화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의 원작자인 알랭 로브그리예의 글이 인용되어 있다. 로브그리예는 "머릿속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를 종이 위에 재현하는 형식"으로 시나리오를 기술했다고 하는데, '뒤틀린 망상의 세계'라는 이미지가 두 작품을 하나로 겹쳐지게 만든다. <여름의 마지막 장미>에서 연주되는 여섯 개의 변주는 하나의 사건(주제)이 여섯 사람의 머릿속에서 어떻게 상영되고 있는지 재현해준다. 이것은 현실과 생각(상상)과 기억이 한데 버무려지면서 끊임없이 하나의 영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우리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온다 리쿠의 <여름의 마지막 장미>는 사건의 기승전결이나 미스터리의 트릭을 파헤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변주곡이 끝날 때마다 독자의 머리속에 남겨지는 '인상'(이미지)을 선율로 하여 여섯 개의 변주가 머릿속에서 하나의 곡조로 어우러지도록 감상해보는 것이 이 책을 즐기는 방식이 아닐까 한다.
지금도 우리의 머릿속에는 현실의 사건과 생각(상생)과 기억이 한데 버무려진 영상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다. 그것은 현실인가, 환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