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법칙 민음사 모던 클래식 35
러셀 뱅크스 지음, 안명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이 시대의 자화상이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의 자화상

 
민음사의 모던 클래식은 스스로를 이렇게 정의내린다. "과거의 유산이 아닌 살아 있는 고전, 이들 현재진행형의 고전을 '모던 클래식'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그 역할과 가치를 이렇게 요약한다. "이 젊은 고전들은 시대의 보고이자 미래의 유산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호밀밭의 파수꾼>에 견주어지는 <거리의 법칙>은 '이 시대' 안에 살고 있는 '10대의 불안'을 정밀하게 그려냈다는 데 가장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거리의 법칙>은 이 시대의 자화상이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머나먼 별에서 어쩌다 우연히 이곳에 오게 된 아이들로, 어른들에 비해 너무 약하게 만들어졌으며 말도 할 줄 모르고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데다가 돈 한 푼 없이 이곳에 왔기 때문에 모든 걸 어른들에게 의지하면서 어른들 틈에서 살아야만 하는 존재들 같았다. (...) 그리고 이제 그들에게 남은 건 그들을 아이들이라고 부르면서 마치 그들이 영혼을 가진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닌 자기들의 소유물인 양 행동하는 어른들과 함께 지구에서 살아가야 하는 삶뿐이었다"(473).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를 하고 어느 날 밤, 빚쟁들이 몰려들자 우리 가족은 피신을 해야 했다. 그때 작은 트럭을 타고 이동을 했는데, 아버지는 짐을 싣는 곳에 이불을 깔고 우리 삼남매를 나란히 눕게 했다. 그리고 다시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어주셨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이불을 눈밑까지 내리고, 달리는 트럭 위에 누워 바라보았던 그날 밤의 별빛이 아직도 눈에 선한다. 막 열 살이 되던 해였고, 그때 세상이 처음으로 무서웠다. 어쩌면 그날부터 어른이 될 준비를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어른들의 세계가 나의 세계로 침투했고, 나만의 세상을 흔들어댔다. 돌이켜 보니, 참으로 혼란하고 숨가뿐 시대 속에서 성장했다. 그렇게 어른이 된 나는 <거리의 법칙>을 읽으며, 나에게 세상은 어떤 곳이었는지 다시 생각해보았다. '나'를 중심으로 바라보던 세상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는 나를 바라볼 수 있는 보다 큰 그림이 그려진다.

여기 거리로 나선 한 소년이 있다. 열네 살 소년 채피가 '집'을 떠나 '거리'로 나서게 된 것은 마리화나를 사기 위해 엄마의 '동전'을 몰래 훔치다 들켰기 때문이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는 "매우 영리하지만 다른 사람의 삶에는 무감각한" 그들, 우리, 현대인들 때문이다. 이제 열네 살이 된 소년은 다른 사람에게 인식되는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부모님은 나의 불량한 태도와 마약 그리고 역겨운 외모 때문에 영원히 나를 깔보며 수치스러운 존재로 여겼다. 최소한 엄마는 그랬다. 그리고 경찰들에게 나는 범죄자였고 가치 있는 한 인간이 아니라 그들을 성가시게 하는 존재였고, 주민들을 상대로 소규모 마약 장사를 하는 또 한 명의 약에 취한 낙오자요 부랑아였다"(66).

어린이(청소년)는 어른의 돌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회는 자라나는 세대를 잘 양육해야 할 책임이 있음 또한 잘 알고 있다. 일차적으로 어린이가 돌봄을 받고 양육을 받는 곳은 가족 안에서이다. 우리는 '가정'이야 말로 가장 안전한 보금자리이며, '가족'이야 말로 가장 순결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곳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의 모습은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는 판타지에 가깝다. 가정은 오히려 원초적인 공격성을 가장 빈번하게 배출하는 곳이도 하다.

채피의 불행의 시작은 양아버지가 집으로 들어오고부터이니, 그보다 먼저 부모의 이혼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채피는 양아버지로부터 심각한 성적 학대를 당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끔찍한 비밀이었으며, 그의 인생의 부서진 부분이었다. 다른 사람과 있을 때 그는 '독립적인 인간'일 수 있었지만, "양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여전히 어둠 속에 홀로 누워 있는 어린 채피"(253)였다.

"누구든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과거와 관계를 끊어 버리면, 그 순간 모든 길들이 절망적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더 가까운 길도 더 먼 길도 없고, 모두 다 똑같이...... 절망적이다"(153).

학대와 무관심과 무시 속에 내버려졌던 10대 소년 채피는 엉망진창이 된 집과 가족을 버리고 거리로 나선 순간 친구인 러스와 함께 '범죄의 사다리를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는 어린 범죄자'(164)가 된다. 거리에서도 그들을 향한 학대는 계속 되었기에, 그들은 스스로 범죄자로 사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찌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학대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결코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그들과 같은 인간으로 존종하지 않았고, 한낱 어린아이로만 여겼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막을 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학대당한다"(165).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이 없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거리 속에 머문다.

<거리의 법칙>이라는 제목에 착안하여, '공간'이라는 틀 안에서 이야기를 재구성해보자.
엄마와 양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이동주택,
친구 러스와 폭주족들과 같이 살았던 오세이블의 비디오 덴 위층,
아이맨과 프로기와 함께 지냈던 버려진 스쿨 버스,
자메이카로 건너가 친아버지를 만나게 된 스타포트 저택,
아이맨과 함께 지내며 자신과 인생에 대해 배운 개미 농장과 아캄퐁의 밭!

채피는 이 중 아이맨과 프로기(로즈)와 함께 지냈던 스쿨 버스 안에서 처음으로 행복을 느낀다. "이제야 진짜 집을 찾은 것 같았다. 진짜 가족을 만난 것 같았다. 이 퀴퀴한 들판의 낡고 찌그러진 스쿨버스에서"(210). 채피가 행복을 느끼고, 자신과 인생에 대해 배움을 얻은 것은 '가정'이라고 할 수 있는 '주택'에서가 아니라, 스쿨 버스나 농장과 같은 '거리'에서였다. 그는 피를 나눈 가족이나 허울 뿐인 우정으로 묶인 친구에게서가 아니라, 불속에서 자신을 구하려다 죽은 악당 '브루스'와 불법체류자였던 자메이카인(아이맨)과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프로기 또는 로즈)에게서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자산임을 깨닫는다. "내가 사랑하겠다고 선택한 사람들은 세상에 오직 이 세 사람뿐이었는데, 모두 내 곁을 떠나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날 아침 모베이에서 마지막으로 러스를 본 날, 나는 귀여운 로즈 자매와 아이맨과 브루스가 내게 큰 재산을 남겨 주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분명히 깨달았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나는 그 재산을 야금야금 꺼내 쓰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470).

<거리의 법칙>이 보여주는 이 시대의 자화상은 어떤 모습인가? 나는 채피가 '스타포트 저택'을 묘사하는 구절에서 이 시대의 모습을 보았다. "몇 달, 몇 년, 아니 내가 알기로는 노예시대 이후 수백 년 동안 이 저택은 마치 쾌락의 섬처럼 평범한 삶의 어둠 속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나를 자극하고 흥분시켜 끊임없이 발기하게 만들며, 지금까지 나는 그런 욕망을 줄곧 끙끙대며 혼자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447).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채피에서 '본'으로 이름을 바꾸고, 거리에서 세상을 배우며, '진정으로 자신을 보는 법'을 깨달아가는 10대 소년에게 그것은 "자신을 들여다보고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대신 자신으로부터 세상을 내다보고 앞을 바라보게"(472) 되는 과정인 듯하다.

인생이라는 것은 경계가 없는 듯하다. 정확하게 선을 그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어린아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어른이라 할 수 없고, 어느 부분이 과거이고 어느 부분이 현재라고 구분 지을 수 없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며, 아무리 추악하고 끔찍한 과거라 해도 '나'에게서 분리해낼 수 없고 단절시킬 수 없다. '본'으로 이름을 바꾼 채피가 진정한 라스타파리안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백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했듯이, 진정으로 자신을 보는 법을 깨닫기 위해서는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을 먼저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타고난 자기 자신, 주어진 세계 안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본'처럼 "자신으로부터 세상을 내다보고 앞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 안에서 퍼져 나오는 밝고 새로운 빛을 이용해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내게 달린' 것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독립적인 인간으로, 그리고 책임 있는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본, 네게 달렸어. 이 대답이 바로 내가 원하는 전부이다"(476).

<거리의 법칙>은 '모던 클래식'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작품이다. 현재와 소통하는 감각이 문학적인 낭만과 잘 조화를 이룬다. 꽤 두꺼운 책이지만 지루하지 않게 읽었다. 더불어, 전에는 그 가치와 재미를 크게 느끼지 못했던 <호밀밭의 파수꾼>이 비로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은 '시대'(의 불안)에 대한 공감의 부족 때문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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