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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운명적 만남 : 한국편 - 김유신과 김춘추에서 김대중과 김영삼까지 ㅣ 역사를 바꾼 운명적 만남 시리즈 1
함규진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한 그루의 소나무여, 이득한 세월을 견뎌
몇 만 겹으로 둘러싼 산속에서 자라났구나.
다행히도 훗날 다시 보게 되려는가.
인간 세상의 만남은 잠시 지나간 자취 되는 것을.
이성계와의 첫만남에서 정도전이 손에 피가 흐르도록 소나무 껍길을 벗겨내고, 하얗게 드러난 나무 속살에서 쓴 시이다(57). 저자는 이것이 이성계의 뇌리에 자신과의 만남의 의미를 똑똑히 새겨두려는 정도전의 퍼포먼스였다고 풀이한다. 정도전은 "인간 세상의 만남은 잠시 지나간 자취 되는 것"이라고 만남의 덧없음을 노래했지만, 이 노래로 그 덧없음을 극복해냈다. <역사를 바꾼 운명적 만남>은 한국 역사를 돌아보며,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만남의 순간들을 포착해내고 있다.
역사의 (숨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더욱 흥미를 가질 만한 책이다. <역사를 바꾼 운명적 만남>은 한국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역사적 만남의 한 장면을 '소설적인 서술'로 재현하며, 그 역사적 함의를 풀어내고 있다. '소설적인 서술'이라 함은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역사의 한 장면을 극적으로 재구성했다는 뜻이다. 이 책을 읽으며, 역사는 역시 '이야기'로 배워야 재밌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보게 된다.
이 책은 한국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역사적 만남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묶어내고 있다. 각각의 카테고리는 그 안에서 서로 짝을 이루는 인물들의 만남에 대한 하나의 '평'이기도 하다. 카테고리만 보아도 그 만남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짓고 있는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만남을 통하여 비로소 역사에 큰 획을 긋게 된 <물과 고기의 만남>, 만남 이후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사이가 됨으로써 당사자들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주고 역사의 물줄기까지 바꿔놓은 <불과 얼음의 만남>,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죽고 못 사는 존재가 되고 그 열정이 지나쳐서 시대의 틀마저 불태우거나 그을음을 잔뜩 묻혀버린 <불과 나무의 만남>, 서로 만나기 어려웠던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를 존중하며 좋은 영향을 남기고 돌아선 <산과 바다의 만남>, 한때는 단짝이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서로의 갈 길로 떠나가버려, 그 때문에 많은 기회와 희망이 아쉽게도 스러지고 만 <구름과 구름의 만남>이다"(6-7).
이 책의 카테고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만남은 <불과 나무의 만남>이었다. 시대가 인정하지 않은 사랑으로 무너져버린 진성여왕과 김위홍의 만남에서부터 정치적인 야심이 컸던 박마리아와 이기붕과의 만남까지 시대가 허락하지 않은 열정으로 자신을 송두리째 태워버린 '여성'의 삶을 역사적인 만남이라는 시각에서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성여왕은 사랑에 겨워 정치를 부담스러워했다. 정난정은 한없는 파격과 일탈을 사랑의 표시로 여겼다. 홍랑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불사했다. 자신의 총명함을 저버릴 수 없었던 이예순은 종교에 열중했고, 나혜석은 그림에 매달렸으며, 박마리아는 정치적 야심을 불태웠다. 그러나 그 모든 열정과 사랑은 불행히도 시대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 그녀들이 일으킨 불꽃이 시대와 세상의 낡은 틀을 다만 얼마라도 태워버리고, 새로운 역사를 쓰도록 하긴 했지만"(225).
이제는 어찌해볼 도리 없이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이고 굳어져버린 사건인데도, 역사가 다이나믹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것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어떠한 기준으로 해석해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고, 전혀 다른 교훈을 길어낼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같은 역사적 소재를 다루면서도 가장 극적인 장면을 포착해내는 탁월함이 있다. 역사적 깊이 보다는 이야기적 재미에 만족할 수 있는 독자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