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장
신란 지음, 이영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애절하다. 핑크빛도 부족한 핏빛 사랑 이야기. 전에는 이런 책을 읽으면 사랑을 꿈꾸었으나, 지금은 외로워진다. 사랑에 삼켜지고, 그리움의 불꽃에 통째로 살라져버린 한 여인의 삶이 내 가슴에 남긴 것은 뜨거운 잿더미도, 붉은 정열도 아니다. 그 무엇으로도 절대 채워지지 않는 저주에라도 걸린 것처럼, 텅비어버린 허공 하나 남았다. 시린 가슴을 달래줄 달달한 코코아라도 한 잔 마셔야 할까.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다지만 이기적인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가벼운 사랑 게임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철지난 유행처럼 촌스럽기만 하다.

<풍장>은 실화처럼 꾸며져 있다. 저널리스트로 일하며 평일 야간에는 중국 여성의 삶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는 한 여인이 등장하여(이 여인은 실제로 저널리스트이자 라디오 진행자로 활동했다는 저자를 연상시킨다), 청취자의 제보로 알게 된 한 기묘한 여인과의 인터뷰를 들려준다. 그 여인은 낡은 가죽, 썩은 우유, 짐승 배설물 냄새를 짙게 풍기는 티베트 옷차림을 한 중국 여인이었다. '그런데 왜 티베트인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녀의 이름은 '수원'이었고, 인민해방군의 군의관이었던 남편 '커쥔'은 결혼한 지 삼 주 만에 소집 영장을 받고 티베트로 파병되었다. 그리고 두 달 후에 남편의 사망통지서를 받았다. 남편이 죽었다는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원은 남편이 어딘가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직접 티베트로 남편을 찾아나서게 된다. 그를 티베트에 홀로 버려둘 순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남편을 찾아 티베트의 고원을 떠돌게 된다. 삼십 년이나 말이다.

기어이 티베트로 가겠다는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한 한 장교는 원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 "전쟁은 공부할 시간도, 적응할 기회도 주지 않네. 사람들간에 사랑과 증오를 확실히 구분 지어 주지. 군의관들이 직업적인 의무와 군명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한 가지만 명심하도록.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승리라는 걸"(40). 그러나 과연 그럴까? 과연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승리일까? 행방불명된 남편을 찾아 티베트 고원을 떠돌았던 '원'의 삼십 년은 예상했던 것보다 스펙타클한 모험도 아니었고, 여정의 절절함이 밀도있게 묘사되고 있지도 않다. 티베트의 고원에 갇혀 허망하게 흘러가버린 시간이었다. 티베트에서 보낸 그녀의 삼십 년은 텅 빈 하늘처럼 그녀의 인생에서 텅 비어버리고 만다. 사랑에 이끌린 삶이었지만, 그곳은 전쟁터였고, 황량한 고원이었고, 모든 것이 생경한 낯선 이방의 땅이었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역사와 정치의 소용돌이 휘말려버린 두 문명의 충돌에 있었다. <풍장>은 티베트의 한 유목민 가족과 생활하는 원을 통해 중국의 것과 충돌하는 티베트 유목민의 생활상과 가족문화를 보여준다. 티베트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사원이라 할 만큼 불성으로 가득한 문화 안에서, 모든 것을 함께 나누며 조용히 자급자족하고 시간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그 무한한 공간을 떠돌며, 원은 욕심을 버리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마침내 삼십 년이라는 잔혹한 세월을 건너 남편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티베트의 '풍장' 문화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자연히 세상에 태어나 자연히 세상을 떠나지요. 생과 사는 윤회의 일부입니다. 죽음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에요. 우리는 내세를 간절히 고대하지요. 풍장 터에서 뽕나무 가지를 태우면 그 연기가 하늘과 땅 사이의 오색길로 피어올라 영들을 제단으로 이끕니다. 우리는 영들에게 시신을 제물로 바치고, 시신의 영혼을 하늘로 데려가 달라고 빌지요. 뽕나무 연기가 썩은 고기를 먹는 독수리 같은 신성한 새들을 불러 오면, 그 새들이 시신을 먹어요. '호랑이에게 육보시한 석가모니'를 본받은 겁니다"(184-185).

넌더리를 칠 만큼 풍장의 풍습을 두려워하는 중국 여인 '원'과 풍장의 의미를 설명하는 티베트의 여인 '줘마'의 대화는 이 책의 또다른 주제라는 생각이 든다. "원은 가족이 니의 장례를 풍장으로 지낼까 봐 겁이 났다. 줘마의 아버지가 숨을 거둔 후 그 시신을 절단하고 산속 제단에 남겨 독수리에게 육보시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원이 넌더리를 치자, 줘마는 풍장이란 티베트의 하늘과 땅, 자연과 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표현이니 혐오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답했다"(128-129).

중국의 티베트 침공이라는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은 한없이 불편한 책이다. 중국의 티베트 침공이 비판적인 문제의식 없이 얼버무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인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사랑이라는 코드로 세대를 뛰어넘는 소통을 이루어낸다. "어머니 세대의 사람들이 젊은 시절 이토록 뜨거운 사랑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16).

그러나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철지난 유행처럼 촌스럽기 그지 없지만, 비웃는 마음 한 편으로 여전히 그것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사랑에 대한 환상이 클래식하게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짧은 편지 한 장의 여운이 날 잠못들게 하고 있다. 

 

사랑하는 쥔

잘 지내고 있는 거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한 마디밖에 없어. 미안해. 여태 당신을 못 찾아서 미안해. 혼자 힘으로 고원을 구석구석 뒤지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미안해.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서 줘마와 티베트 가족에게 미안해(104). 

 

사랑하는 원에게

내가 오늘 돌아오지 못하면, 내가 어떻게 됐는지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전해주겠지. 부디 날 이해하고 용서해주길.

당신을 사랑해. 내가 천국에 갈 수 있다면, 당신이 무탈하고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보살피며 당신을 기다릴게. 지옥에 간다면, 우리 두 사람이 살면서 진 모든 빚을 갚고 당신이 생을 다했을 때 천국으로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야. 귀신이 된다면, 밤마다 당신을 지켜주고 당신을 괴롭히는 모든 혼을 쫓아줄게. 갈 곳이 없다면, 난 허공으로 흩어져 당신의 모든 숨결과 함께할 거야.

고마워, 내 사랑.

우리 둘 모두 잊지 못할 날에

밤이든 낮이든 당신만을 생각하는 남편 커쥔이(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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