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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 신야, 여행의 순간들
후지와라 신야 글 사진, 김욱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여행의 순간들. 그 단편적인 기억이 그를 말한다.
후지와라 신야라는 여행 작가를 알고 있는 독자에게 더 의미가 깊은 책이 아닐까 싶다. 조각보 같은 여행의 시간대와 이야기의 무대가 특정한 지점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무형(심정)의 틀에서 이탈해 유형(즉물)을 묘사했기 때문인지 '나그네 차림'에 가까운 나의 실체가 이보다 더 적나라하게 확인된 적은 없다"(211)는 저자의 후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후지와라 신야, 여행의 순간들>은 '후지와라 신야'가 도드라져 보인다.
영화 감독판 같기도 하고, 메이킹필름 같기도 하고, 편집으로 잘려나간 촬영분을 다시 편집해보여주는 스페셜 방송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작가는 이 책의 콘셉트를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이번 여행기에서 시도하고자 했던 것은 미처 꺼내지 못한 원석들을 닦거나 형태를 정돈하지 않고 독자 앞에 그냥 내던지는 것이었다"(211). 메시지를 담아내려 하지 않고, 여행하며 겪은 '에피소드' 자체를 그저 즐거이 이야기하려 한 책. 재밌는 것은, 그의 독특하고 특별한 '사유'를 읽을 수 있었던 다른 여행책에서 보다, 그저 '경험'을 이야기한 이 책에서 '후지와라 신야'라는 사람을 더 잘 알게 되는 느낌을 받는다. 어째서일까.
결국 이 모든 것이 흘러가는 삶이었다. 삶은 여행이니까.
후지와라 신야,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사유는 무엇인가를 뽐내려는 겉멋이 전혀 없었고, 무거울 정도로 진지했으며, 생에 대한 열기가 가득했지만 이상하게 음산하리마치 어두웠다. 그 독특한 분위기는 이 책에서도 여전하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후지와라 신야는 이전의 책들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귀여운' 구석이 있다. 산탄총을 들고 인도 사창가에서 허세를 부리고, (가장 씁쓸한 이야기였지만) 한국 여행이 지루해질 무렵, 부산 외곽의 한 식당에서 그냥 돔을 돌돔이라고 속여 파는 주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던 순발력, 젊은 에너지와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분위기에 휩쓸려 코브라의 독을 마실 만큼 새로운 경험을 '함부로' 좇았던 무모함, 무시당한 기분을 참지 못해 가던 길을 돌려 텍사스의 도넛 가게로 돌진했던 용기까지, 귀여울 정도로 '겁 없는 여행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겁 없이 낯선 여행지를 이처럼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던 그의 이야기에서 숨겨진 절박함이 느껴지도 한다. 무엇이 이 청년을 이렇게 겁 없는 여행자로 만들었을까. 후지와라 신야의 책을 네 권이나 번역한 역자는 그를 가리켜 "물질문명과 부조리한 사회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던 아웃사이더 청년"이었다고 말한다. 그의 청년 시절 일본을 생각하니, 오쿠다 히데오의 책 <올림픽의 몸값>에서 보았던 도쿄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가 비웃을 테지만) 어쩐지 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서로가 짓밟고 짓밟히며 미친듯이 성장을 향해 달려가던 시절, 치열했던 시절, 그 미친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고자 그는 드넓은 세상을 향해 겂도 없이 나아갔던 것일까. 여행은, 질식할 것 같은 세상에서 그가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으리라.
여행에 경계가 없었던 이 자유로운 영혼의 여행가는 이제 할아버지가 되었다. 나이 따위는 상관 없이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글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전진에서 얻을 수 없는 더 큰 지혜가 노년의 기억 속에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마음을 붙들었다. 그의 여행기는 내게 교차점과 같은 것이었다. 문화와 문화가 교차하고, 쾌락과 구도가 교차하고, 물질과 정신이 교차하고, 삶과 죽음이 교차한다. 후지와라 신야라는 한 청년 안에서 들끊었던 회의와 호기심과 방황과 깨달음이 하나의 커다란 용광로가 되어 이 모든 것을 그 안에서 녹여내었다. 특별히 이 책에서는 과거와 오늘이 교차하고, 그때 그 시절과 그것을 회상하는 노년이 교차한다. 그가 지나온 여행의 순간들은 저항하는 꿈이었고, 찾아가는 꿈이었고, 그의 삶을 채워가는 인연이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이 모든 것이 결국 흘러가는 삶이었다.
여행은 '오늘'도 계속된다.
후지와라 신야는 "세이셸 제도의 마에 섬 변두리인 얼친 만 모서리에 개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이름이 해피인 이 개는 형제처럼 자신을 귀여워 했던 주인의 아들 오조가 보트를 타고 떠난 그 다음 날부터, 언제나 같은 시간에 바닷가로 나간다고 한다. 보트가 떠난 바로 그 시간에. 정확하게 284일째 바닷가로 나가 오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해피가 불쌍하다고 말하는 엠레에게, 후지와라 신야는 이런 말을 해주고 싶어 했다.
"엠레, 해피가 사람처럼 숫자를 세면서 오조를 짊어지고 있었을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오조가 떠난 바닷가에는 어제와 똑같은 오늘, 오늘과 똑같은 내일, 내일과 똑같은 내일모레가 있을 뿐이야, 머리 위의 태양처럼. 해피는 오늘밖에 몰라. 오늘의 몇 시간을 가장 사랑하는 친구가 올 것이라는 희망과 함께 살고 있는 것뿐이야"(126).
낯선 풍경 속을 홀로 걸으며 지구촌의 나그네로 살아온 후지와라 신야. 하루는 분노하고, 하루는 감사하고, 하루는 아파하고, 하루는 즐거하고, 하루는 쓸쓸해 하고, 하루는 만족하며, 그렇게 '오늘'을 살았을까. 숫자를 헤아리며 흘러가는 삶을 쓸쓸해 하는 내게, 자신은 "오늘밖에 모른다"고 대답하는 듯하다. 가장 사랑하는 친구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오늘의 여행을 떠나자고. 삶이 계속되는 한 여행은 계속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