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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 - 길 내는 여자 서명숙의 올레 스피릿
서명숙 지음 / 북하우스 / 2010년 8월
평점 :
토목공화국 토목특별자치도에서 길쟁이로 산다는 건 미친 짓이다.
토목공화국의 미친 속도에 맞서서 걷는 길을 내려면 입에서 단내가 난다.
그러나 이 미친 짓이 즐거운 걸 어쩌랴(252).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나는 수첩에 이런 기도제목을 적어넣었다. "하나님, 나도 제주올레 같은 미친 꿈을 꾸고 싶습니다!"
올 여름 나는 처음으로 제주도 땅을 밟았고, 제주올레길 중 가장 아름답다는 7코스를 걷는 행운을 누렸다. 많은 분이 세계 어디를 가도 이런 길이 없다 하셨다. 해외 여행을 많이 다녀보지 못하여 비교우위를 논할 수 있는 안목은 내게 없었지만, 이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평화로운 길인지 절대 가치는 마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제주올레길이 자연이 만들어준 천연의 길이라 생각했던 나는 <꼬닥꼬닥 걸아가는 이 길처럼>이라는 책을 읽고 두 가지 사실에 크게 놀랐다. '길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한 번 놀라고,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길을 내는 중'이라는 사실에 두 번 놀랬다.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은 길을 내는 사람들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꿈의 이야기이며, 이미 꿈을 이루어가고 있는 꿈에 미친 사람들의 미친 꿈 이야기이다.
2010년 6월 26일 추자도 올레가 개장되면서 제주올레길은 스물한 개 코스, 340킬로미터에 이르렀다고 한다(252). 오랜 기자 생활을 접고, 홀로 산티아고 길 순례에 나섰다가 문득 피어난 꿈, 고향 제주도에 산티아고 길보다 더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을 만들겠다는 그녀의 꿈이 지금 대한민국에 '올레' 열풍을 일으키고 있고, 세계인의 관심과 찬사를 이끌어내고 있다. 제주 천혜의 해안 코스에 스위스-올레 우정의 길이 생겼다는 소식과 함께, 제주올레의 매력이 산악트레킹의 나라 스위스도 흔들었다는 보도를 접했을 때, 이전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제주도 땅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슴이 얼마나 뻐근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누군가의 '꿈' 이야기에는 늘 '레퍼토리' 처럼 따라다니는 부정적인 시각과 반대 의견이 존재한다. '제주올레'의 꿈도 마찬가지였다. 서명숙 이사장은 "벅찬 꿈을 안고 고향 제주에 내려왔지만, 사람들을 만날수록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풀이 죽어가던 시절"(160)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비싼 비행기 타고 제주까지 걸으러 오겠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고. 부끄럽지만, 국내여행지를 소개하는 어떤 유명한 책에서 같은 말을 읽고 그럴 듯한 평이라고 공감하기도 했었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길은 때로 사람 사이의 길도 낸다"(330).
시시때때로 마음을 짓누르는 회의와 지독한 외로움을 이겨내고, '사람이 사람답게 걸을 수 있는 길'을 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삼년 만에 이처럼 놀라운 성과를 일궈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사람 인연' 때문이었다. "탐사대원을 일일이 호명하노라니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감사하고 소중하다. 이들이 없었더라면 4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삼년 만에 어떻게 낼 수 있었을까. 그들의 소금기와 굳은살이 아니었더라면 그 많은 올레꾼이 어찌 안전사고 한 번 없이 이 평화로운 길을 즐길 수 있었을까. 그들은 뛰어난 식견을 가진 생태 전문가도, 경험 많은 환경 운동가도 아니다. 거창한 대의명분이나 첨예한 사회의식으로 무장한 이들은 더더욱 아니다. 시절 인연이 올레를 만나게 했고 사람 인연으로 올레와 엮였을 뿐. 그러나 그들은 청정 제주의 자연과 생태를 지켜야 한다는 소명을 길 위에서 온몸으로 체득했다. 위대한 교사인 자연과 다정한 벗인 길로부터 '한 소식' 깨우친 것이다"(97).
"아름다운 길을 내는 것도,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도 머리로만 되는 게 아니다.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건 고단한 발품, 순정한 땀방울이다"(97).
제주올레는 돈으로 낸 길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걸을 수 있는 길을 내겠다는 꿈이 꿈과 만나고, 마음이 마음과 만나, "끊어진 길을 잇고, 잊힌 길을 찾고, 사라진 길을 불러내어 한 코스 한 코스 제주올레가 되었다." 재능을 기부한 사람들, 편안함을 포기한 사람들, 미친 꿈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들의 소금기와 굳은살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평화로운 길, 치유의 길, 꼬닥꼬닥 걸어가는 인생의 길을 열어주었고,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고 난 뒤, 제주올레 홈페이지에 방문해보고 또 한 번 놀랐다. 꿈이 담기고, 마음이 담기고, 정성이 담기니 이렇게 다르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이제 제주올레의 꿈은 그녀만의 미친 꿈이 아니다. "꼬닥꼬닥(천천히) 걸어가라"는 책 제목과는 달리, 제주올레라는 푸른 꿈 하나를 가슴에 품고 미친 듯이 달려 서명숙 이사장은 올레길을 열고, 올레꾼을 불러오고, 올레지기를 세우고, 올레 주민들을 품었다. 올레길은 그들과 함께 살아움직이고 있다. "도로포장만 장땡으로 여기던 마을 사람들이 옛길을 복원해 내고, 아스팔트라서 미안하다고 '모다들엉' 바닷가로 돌길을 내고, 탐사대원들이 도로 확장에 맞서서 새로운 흙길을 찾아내면서 올레길은 끊임없이 올레스럽게 진화한다. 올레길은 고정불변의 닫힌 길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열린 길이기에. 완성된 길이 아닌 현재진행 중인 길이기에"(370).
"그대, 떠나기를 두려워 말라. 바람에 걸리지 않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 떠나라. 바람이 그대의 친구가 되고, 들꽃이 그대의 인연이 되어주리니. 떠난 자만이 목적지에 이르는 법이다"(175).
저자의 이 말은 '제주올레'로의 초청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미친 꿈을 꾸어본 사람만이, 두렵지만 길을 떠나본 사람만이, 홀로 바람을 맞아본 사람만이, 들꽃의 위로를 받아본 사람만이, 그리하여 불가능한 꿈이 현실이 되는 벅찬 감동을 누려본 사람만이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초청이리라. 제주올레라는 미친 꿈을 꿈이 아닌 현실로 개척해낸 이 책의 주인공들이 진심으로 부럽다. 하루를 살더라도 이렇게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어 본다. 신이 내게도 이러한 인생 길을 허락해주시기를.
길이 있는 한, 길을 걷는 사람이 있는 한, 올레의 푸른 꿈은 "지금도 ing-! 언제나 ing-! 영원히 ing-!"이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