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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탄생 - 예술가의 창조력을 일깨운 뮤즈 이야기
유경희 지음 / 아트북스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예술가의 창조력을 일깨운 뮤즈 이야기,
잔인했던 것은 그들의 삶이었을까, 예술성이었을까.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습관처럼 차와 음악을 찾게 되는 것처럼, 내 인생의 사랑이라고 하면 당연하다는 듯 가장 먼저 떠오르는 친구가 있다.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그 아이는 사람이 사람을 보고 첫눈에 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내게 알려주었다. 우린 곧 친한 친구가 되었지만, 그 아이를 향한 특별한 감정을 나는 말하지 못했다. 고백하고 나면 우정이 깨질까봐, 어색해질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아이를 만나고부터 내게 새로운 습관이 생겨났다. 밤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자꾸 무엇인가를 끄적이고 싶은 충동이 나를 사로잡았다. 부치지 않을 편지를 밤새 쓰기도 했고, 한낮에 몇 번이나 일기를 쓰기도 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겨울이 지나고, 그 교실에서의 마지막 수업이 있던 날, 나는 60명이 넘는 반 친구 전체에게 편지를 써서 나눠주었다. 깜짝 놀라는 친구들 사이에서 "내꺼는? 내꺼는?"이라고 외치는 그 아이. 편지를 건네며 나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너에게 편지를 주고 싶어서 다른 친구들의 것까지 다 쓴 거야!' 지금 생각해보면 좀 우습기도 한데, 왜 그때는 그렇게 "사랑해"라는 한마디가 미치도록 하고 싶었을까.
<예술가의 탄생>을 읽으며 그때의 일이 떠올랐던 것은, "세기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매혹적인 뮤즈는 무엇일까?"를 묻는 이 책의 테제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술가들에게 창조적 영감을 불어넣는 그들만의 특별한 '뮤즈'가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서, 이 책은 탐구를 시작한다. (예술가의 예술적 행위에 견주기에는 한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무엇으로든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감정의 파도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내 심장에 몰아닥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어떤 충동적인 힘이 나로 하여금 반 친구 모두에게 편지를 쓰게 만들었던 것처럼, <예술가의 탄생>은 세기의 예술가들을 추동했던 매혹적인 '뮤즈'의 실체를 포착하기 위해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입체적으로 읽어냈다.
"나는 이 예술가들의 창조적인 발상과 영감의 근원, 상상력의 원천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밝혀내고 싶었다"(8).
저자는 이에 스스로 답하기 위해 그들의 예술창작의 근원과 그 메커니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그들로 하여금 창조하게 만드는 충동은 어떤 종류의 것일까?
그들은 왜 창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그들의 상상력과 영감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그들의 유년시절, 부모와의 관계는 어땠을까?
그들은 누구와(어떤 것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었던 것일까?
"나는 예술가들의 창작 욕망에 불을 붙이고 고무하는, 즉 상상력과 영감을 고취하는 존재는 그 무엇이든 뮤즈라는 이름을 붙였다"(8). (*뮤즈(Muse)는 제우스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와 동침하여 낳은 아홉 자매로, 올림포스 신전에서 아폴론을 도와 음악을 연주하는 등 예술을 담당하게 된 여신들을 일컫는다)
저자는 이 책에 담은 13명의 예술가가 저자의 삶과 예술의 창조적 근원, 즉 저자 자신의 뮤즈이자 멘토라고 고백한다.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이름의 뮤즈'로 묶인 요코 오노, 구스타프 클림트, 조지아 오키프, 갈라, '아픔이라는 이름의 뮤즈'로 묶인 앙이 드 툴루즈-로트레크, 프리다 칼로, 프란시스코 데 고야, 잭슨 폴록, '꿈이라는 이름의 뮤즈'로 묶인 폴 고갱, 앤디 워홀, 마르셀 뒤샹,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폴 세잔 등 이 책에 등장하는 13인의 예술가는 저자 마음으로 '고른' 예술가라는 뜻이다.
<예술가의 탄생>은 한마디로 격정적인 삶의 이야기이다. 예술가의 뮤즈 이야기는 곧 예술가의 삶의 이야기였다. <예술가의 탄생>을 읽으니, 예술가의 삶도 그 근원은 우리의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킨 예술가의 영감이 부럽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 예술적 광기가 그들의 삶을 더 도전적이고, 더 격정적이고, 더 파괴적이고, 더 병적인 삶으로 몰아갔는지 모른다. 잔인했던 것은 그들의 삶이었을까, 예술이었을까.
존재했으나 사용되지는 않는 사어처럼, 잘 알려진 것이든 알려지지 않은 것이든 작품을 남기고 사라진 예술가의 삶은 이미 굳어진 화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가의 탄생>이 내게 특별했던 이유는 그것을 읽어내는 저자의 거친(!) 생철학 때문이었다. 예술과 삶의 일치를 꿈꾸는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예술가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이질적인, 그야말로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배제하는 타자 혹은 마이너리티로서의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9).
그리고 현대의 예술을 이렇게 비판한다. "예술가를 보려면 그 작품을 들여다보라는 말은 오늘날에는 더는 유효하지 않은 것 같다. 현대야말로, 인간이 배제된 예술이 잘 포장되어 전시장과 시장에 나오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더욱 더 예술가다운 예술가가 절실히 그리운 시대이다"(5).
<예술가의 탄생>이 선택한 13인 예술가의 이야기를 읽으니, 그들의 삶은 마치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 존재를 불태워야지만 폭발력을 갖게 되는 예술의 잔인성, 그 잔인한 불꽃에 모든 것을 던져 예술가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들이야말로 신에게 선택받은 선구자일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이 책의 저자처럼 예술작품보다 예술가의 삶에 더 관심이 많은 나와 같은 독자라면 상당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더불어 유명한 예술작품을 읽어낼 수 있는 예술적 지식과 통찰력까지 덤으로 배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