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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딩씨 마을의 꿈>은 현실을 쓴 것인 동시에 꿈을 쓴 것이고, 어둠을 쓴 것인 동시에 빛을 쓴 것이며, 환멸을 쓴 것인 동시에 여명을 쓴 것입니다. 제가 쓰고자 한 것은 사랑과 위대한 인성이었고 생명의 연약함과 탐욕의 강대함이었습니다"(8).
<딩씨 마을의 꿈>은 중국 농민들이 AIDS에 집단 감염된 충격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이들이 AIDS에 집단으로 감염된 이유는 매혈(賣血) 때문이다.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개혁개방이 시작됨에 중국에 새로운 시장이 하나 형성되었다. 바로 피를 사고파는 매혈 시장이었다. 중국 상부의 주도 아래 대대적인 인민들의 매혈 운동이 있었고, 특히 빈민층에 속하는 중국 농촌에서 매혈붐이 창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저자는 매혈로 집단 AIDS에 감염된 ’딩씨 마을’을 배경으로 사랑과 위대한 인성, 생명이 연약함과 탐욕의 강대감에 대해 쓰고자 했다고 밝힌다.
<딩씨 마을의 꿈>은 악덕 채혈업자, 즉 매혈 우두머리인 ’아버지’로 인해 독살을 당한 열두살 소년의 입을 통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죽어버린, 꿈을 거세당한 힘 없는 소년을 통해 말이다.
딩씨 마을 사람들을 매혈에 동원하라는 상부의 지시 때문에, 학교에서 종을 치고 학교를 지키는 일을 맡고 있어 ’딩 선생’으로 불리는 소년의 할아버지가 나섰다. 할아버지는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물처럼, 피도 샘물과 같이 퍼내면 퍼낼수록 더 왕성하게 생성된다고 설득했고, 일찌감치 미친 듯이 피를 팔아 부자가 되고 있는 이웃 마을로 견학을 다녀온 농민들은 부자가 되는 꿈을 꾸며 팔을 걷어올리기 시작했고, 딩씨 마을에 열 개가 넘는 채혈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날 때 할아버지의 아들 ’딩후이’도 채혈소를 차렸다. 딩씨 마을은 너도나도 미친 듯이 피를 팔기 시작했다(56).
채혈업자들은 나무로 만든 간판 하나씩 세워 놓고 그 위에 채혈소 이름만 몇 자 쓴 다음 간호사와 회계사만 갖추고서 채혈소 업무를 시작했다. 채혈업자 딩후이는 곧 부자가 되었다. 피를 판 사람들 중에 딩후이 만큼 부자가 된 사람은 없었다. 비위생적인 헌혈 바늘을 사용하고 솜 하나로 세 사람을 소독하도록 한 채혈업자 딩후이는 ’열병’(AIDS)에 감염되지 않았지만, 딩후이에게 피를 판 사람들은 ’열병’(AIDS)에 감염되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맙소사! 자네 아직 살아 있었군?"
또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며칠 동안 머리가 좀 아프기에 열병인 줄 알았지. 그런데 아니더군."
두 사람 모두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웃었다.
(...)
이것이 바로 딩씨 마을의 모습이었다.
이것이 바로 딩씨 마을이 가슴을 졸이며 애타게 기다리는 열병과 세월이었다(26-27).
곧 죽을 것이라는 자각! 그것이 어떻게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가?
딩씨 마을 사람들은 "모두 오늘은 있지만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91). 그들이 꿀 수 있는 유일한 꿈은 ’하루라도 즐겁게 보내는 것’이었다. 작가는 <딩씨 마을의 꿈>이 "오늘과 내일에 대한 기대와 인성의 가장 후미진 구석에 자리한 욕망과 그 꺼지지 않고 반짝이는 빛이었습니다"(8)라고 말한다. 작가의 이러한 의도는 열병에 감염된 딩량과 링링의 열꽃 같은 ’불륜’을 통해 적나라 하게 드러난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생(生)의 절망을 낳고, 생의 절망은 무모한 용기를 낳는다. 그 무엇도 두렵지 않게 만든다. 불륜도 두렵지 않게 만든다. "살아 있는 동안 며칠이라도 그녀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304). 또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새로운 꿈을 낳는다. 그렇게 태어난 꿈은 절박하고 집요하다. "살아 있을 때 며칠이라도 떳떳하게 살고 싶은" 딩량과 링링은 죽을 날이 멀지 않았지만 끝내 소원대로 정식 부부가 된다.
생명의 연약함과 탐욕의 강대함! 탐욕은 어떻게 생명을 좀먹는가?
<딩씨 마을의 꿈>에서 가장 탐욕스러운 사람은 채혈업자 ’딩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매혈뿐 아니라, 관을 팔고, 음혼을 주선하며 부자의 꿈을 이루어간다. 그러나 이 책의 지독스러움은 딩후이의 탐욕 때문이 아니다. 열병으로 병색이 완연한 사람들이 서로의 것을 도둑질한다. 열병(AIDS)에 걸린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지도자’가 되겠다고 다툰다. 죽어서 들어갈 ’관’에 욕심을 낸다. 돈이 있고 권세가 있는 사람들만 관을 쓸 수 있고, 더 좋은 관을 쓸 수 있다.
열병에 걸린 사람들과 공동 생활을 할 때, 그들의 쌀을 훔치기도 했던 ’자오씨우친’은 열병에 걸렸으나 열병 때문에 죽지 않았다. "열병에 걸린 뒤로 지금까지 일 년도 넘게 살았거든. 그런데 왜 죽었냐 하면, 며칠 전에 쌀을 한 자루 가져다가 문 옆에 놓아두었는데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집에서 키우던 돼지가 그걸 다 먹어 버렸대. 자오씨우친은 너무 화가 나서 돼지를 쫓아다니며 두들겨 팼겠지. 돼지 등짝에서 피가 날 때까지 패다 보니 그녀도 지쳤던 모양이야. 위에서 피가 나기 시작하더니 며칠 전에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지"(301-302).
살아 있을 동안만이라도 링링과 결혼을 해서 떳떳하게 살고 싶다는 아들 딩량을 위해 ’할아버지’가 나섰을 때, 며느리의 불륜을 용서하지 못하는 시어머니는 이렇게 비난했다. "아주버님도 글을 가르쳤던 사람인데 어떻게 그 못난 연놈들을 위해 뻔뻔스럽게 찾아와서 그런 이야기를 다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이것을 이용하여 한몫 잡아볼 심산으로 거래를 요구한다. 이혼을 해주는 조건으로 ’오천 위안’을 요구한 다. 아내에게 열병에 발명하자 따귀부터 올려부치며 공동생활을 하는 곳으로 내몰았던 남편은 이혼을 조건으로 딩량의 모든 재산을 가로채려 한다. 비록 불륜이지만 생의 끝자락에서 마지막 희망으로 서로를 붙들었던 딩량과 링링보다 더 뻔뻔하지 않은가.
탐욕에 먹힌 생명. 딩씨 마을은 그렇게 시들어갔다. "사람이 죽는 것이 나무에서 나뭇잎이 떨어진 것과 같았다. 등불이 꺼진 것과 같았다. 무덤을 파고 사람을 묻는 일이 삽을 들어 마을 어귀에 구덩이를 파고 죽은 고양이나 개를 묻는 것만큼이나 순조로웠다. 슬픔도 없었고 울음소리도 없었다. 울음소리와 슬픔은 말라버린 강과 같아서 소리도 없고 호흡도 없었다. 사람들의 눈물은 맑게 갠 날 허공에 떨어지는 빗방울만큼이나 희박하여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말라 버렸다"(373-374).
<딩씨 마을의 꿈>은 딩씨 마을의 이야기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딩씨 마을의 꿈>은 구약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요셉이야기에서 '네 사람의 꿈'을 따오면서 시작된다. 자신의 관직이 곧 회복될 것을 예고하는 술 맡은 관원장의 꿈, 곧 죽게 될 것을 예고하는 '떡 맡은 관원장의 꿈', 흉악한 흉년을 예고하는 '파라오의 첫 번째 꿈', 흉악한 흉년이 반드시 올 것을 예고하는 '파라오의 두 번째 꿈'이 그것이다. 이 꿈들은 모두 가까운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예고한다. 왜 작가는 이러한 장치를 해두었을까?
<딩씨 마을의 꿈>은 서사가 전개되는 중간 중간에 고딕체로 구별하여 '꿈'을 이야기한다. 읽다 보면, 꿈과 현실의 경계에 서서 꿈인 듯도 하고, 꿈이 아닌 듯도 하고, 그 경계가 모호하지만, 분명 '꿈'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구별됨이라 생각된다. <딩씨 마을의 꿈>은 실제 사건이다. 작가는 그것을 <딩씨 마을의 꿈>이라는 제목 안에 담았다. 딩씨 마을의 비극은 '꿈'에서 시작되었다. 피를 팔아 한몫 챙기겠다는 그들의 꿈이 현실의 비극을 낳았다. 작가는 <딩씨 마을의 꿈>을 통해 '꿈'이 현실을 이끌어간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지도 모르겠다. 꿈은 현실을 낳는다. 현실은 꿈을 반영한다. 배의 방향을 잡아나가는 키처럼, 인생을 이끌어가는 '꿈'. 탐욕에 먹혀버린 딩씨 마을. 탐욕이 잉태하고, 탐욕을 잉태한 그들의 꿈은 딩씨 마을을 탐욕의 바다로 몰고나갔고, 그들의 꿈은 모두 이루어졌지만, 딩씨 마을은 파선했고, 결국 탐욕의 바다에 침몰했다.
집단으로 AIDS에 감염된 사람들처럼, 우리 모두 죽음에 감염되어 있다. 죽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을 알고 있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선 우리. 죽음을 눈앞에 둔 우리가 꾸는 꿈은 무엇인가? 딩씨 마을의 꿈과 다른가? 지금 어떤 꿈이 우리의 현실을 만들어나가고 있을까?
아직 우리가 꿀 수 있는 꿈이 남아 있을까?
<딩씨 마을의 꿈>은 할아버지가 "새롭게 펄쩍펄쩍 뛰는 세상을 꿈"(455)꾸며 끝이 난다. 어쩌면 불멸이 아니라,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이 그만큼 생(生)을 더욱 소중하게 만들어주고, 잘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심어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절망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작가는 <딩씨 마을의 꿈>이 현실을 쓴 것인 동시에 꿈을 쓴 것이고, 어둠을 쓴 것인 동시에 빛을 쓴 것이며, 환멸을 쓴 것인 동시에 여명을 쓴 것이라고 말했다. 현실을 읽으며 꿈을 꾸어야 하고, 어둠에 갇혀서도 빛을 기대하며, 지독한 환멸 속에서 여명을 발견해야 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리라.
"저는 이미 나이가 예순이 넘었고 여러분들 역시 오늘 얼굴을 마주하면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미래를 위한 겁니다. 우리가 죽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서 다음 세월을 보내야 합니다"(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