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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미 ㅣ 이타카
김지훈 지음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인간의 역사는 세 개로 나눠진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어떻게 먹을 것인가? 왜 먹을 것인가?"(232)
나는 오늘도 백해무익하다는 설탕을 넣어 커피를 마셨고, 먹지 않는 것이 좋다는 가공 식품으로 식사를 했다.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왜 이런 음식들을 먹는 것일까? 맛있으니까?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보다 접근이 쉬위니까? 웰빙 식품보다 값이 싸니까? 아마도 이 모든 것이 버무려져 '습관'이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길들여진 입맛대로 먹는 것이고, 먹어왔던 대로 사는 것이고, 남들 먹는 대로 사는 것이다.
몇몇 '양심적인'(그렇게 믿고 싶다!) 전문가들이 먹어서는 안 될 첨가물을 넣어 만들어진 가공 식품의 정체를 폭로하고 있다. 각계의 전문가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진단한다. 일각에서는 비만을 유발하는 음식을 만들거나 파는 기업에 비만세 또는 건강세를 물려야 한다는 주장도 대두되고 있다. 이런 음식을 아예 생산하지 못하도록 만들면 좋은데, 그것은 또 '자유경제시장' 원리에 위배된다고 한다. 자유경제시장 원리, 다시 말해 경제 논리와 시장 원리, 이 두 가지 메커니즘이 비만을 유발하고, 몸에 해로운 음식을 생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자유경제시장 원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비만이 개인의 선택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소비자가 먹지 않으면, 아무도 찾지 않으면 그런 음식은 당연히 지구상에서 살아진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저소득층의 비만율이 고소득층에 비해 높게 나타나는 통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웰빙 열풍은 '몸에 좋은 먹거리'의 값을 확 올려놓았고, 가공 식품으로 비만해진 '기업'은 다시 웰빙 산업으로 더욱 비대해지고 있다.
<더미>는 비만에 담긴 불편한, 그리고 무서운 진실을 파헤쳤다. 무엇보다 사람의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이 사회에 퍼져나가게 되는 자유경제시장의 메커니즘을 파악할 수 있다. 존 홉킨스 대학교의 한국인 유학생인 '나'는 바이러스 전문가인 프루지너 교수와 함께 바이러스의 비만 유발 메커니즘을 연구해왔다. 그러나 먹고살겠다고 교수가 되는 일에 매달렸던 자신에게 실증을 느끼고 학교를 떠난다. 조용하고 느슨하게, 자유롭게 살겠다는 일념으로. 배낭하나 달랑 짊어지고 학교는 떠난 '내'가 선택한 전략은 '살찌는 방법'을 파는 것이었다(44). 살 빼는 시장보다 살찌우는 시장의 규모가 훨씬 크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가축들을 살찌울 수 있는 식품첨가물을 특허출원하였고, 그것으로 지나이 그룹과 거래를 했다. 지나이 그룹의 변호사인 제드는 '향료'로 특허출원을 하라고 귀뜸해주었고, '나'는 그것의 이름을 '레인보 아미노'라고 지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가축 사료 첨가제인 '레인보 아미노'가 감자칩과 같은 음식물에 첨가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레인보 아미노'를 섭취한 가축을 먹는 것은 해롭지 않았으나, 그것을 직접 섭취하게 되면 비만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레인보 아미노 때문에 뚱뚱해진 사람은 운동으로도 살을 뺄 수 없고, 굶어 죽어도 뚱뚱하다는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맛가루'라 불리는 레인보 아미노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거리에는 점차 뚱뚱한 사람들이 늘어났다. 레인보는 뛰어난 맛으로 사람들을 유혹한 후 비만이라는 질병의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덫이었다(286).
사회 문제를 취재하여 책을 쓰는 스피넬은 '레인보 아미노'의 정체를 폭로한다. 그러나 지나이 그룹과 제드로 대표되는 기업은 레인보 아미노가 비만을 일으키게 되더라도 그것은 레인보 아미노의 잘못이 아니라 사람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고, '내'가 아는 사람들은 레인보 아미노가 사람들에게 맛의 기쁨을 주었다는 점을 강조했고, 그 맛에 중독된 사람들은 뚱뚱한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일 뿐 저항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는 쪽보다 자신이 바뀌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184). 노예처럼! 비만에 적응하고, 비만에 함몰되는 인생을 바라보며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 '나'는 또다른 카포시 그룹과 손잡고 비만 치료제 개발에 매달리게 되지만, 결국 맛에 대한 끝없는 집착과 욕망은 사람고기를 탐하는 '뉴타입' 인류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레인보 아미노의 정체를 폭로한 스피넬은 "보석 중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진실이다"(132)라는 삶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석처럼 빛나는 진실이 아니라, '맛'을 선택했고, 욕망을 선택한다. 재밌는 것은 자신들이 가공한 음식을 먹고 뚱뚱해진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한 비만 치료제를, 기업이 누구보다 간절히 바란다는 사실이다. 비만을 유발하는 음식을 생산하고, 비만 치료제까지 개발이 된다면 무궁한 '시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중국시장에 진출하여 크게 성공한 '한식 음식점'을 취재한 방송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성공한 CEO는 '웰빙'과 '고급화' 전략이 주요했다고 스스로 진단했고, 그 음식점을 찾은 한 중국인은 "이러한 고급 식당을 이용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한다"고 대답했다. '맛난 음식'이 성공의 척도가 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닐 것이다. 그 옛날 임금님의 수라상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더미>는 '레인보 푸드'가 계급의 상징이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레인보 푸드'를 먹기 위해서 가열하게 일하는, 작가의 표현 그대로 '입맛대로 돌아가는 세상'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맛의 노예가 되어가는 사람들! 과장이지만 사실 전혀 과장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도 먹고 살기에 바쁜 인생이라 자조하지 않는가.
<더미> 덕분에 나는 얼떨결에, 약간의 다이어트를 했다. '레인보 아미노'가 들어간 음식을 탐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가공 식품을 즐기는 나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에도 가공 식품을 완전히 끊지 못했다는 것이다. 시장과 경제 논리에 굴복하게 만드는 나의 탐욕을 저주하고 싶다. 우리는 개인의 탐욕과 사회의 탐욕 모두에 저항해야만 한다. 저항을 포기한다면, 노예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애굽을 탈출한 히브리 백성이 먹을 것이 없어 불평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평을 인정하시고(!) '만나'를 내려주신다. '만나'를 질리도록 먹게 되자 백성들은 '맛난' 고기가 먹고 싶다고 불평을 한다. 그들은 차라리 '맛난 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노예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다. 이번에도 하나님은 그들의 불평을 들으시고, 메추라기 떼를 보내어 고기를 먹여주셨다. 그러나 탐욕스럽게 고기를 탐하는 백성에게 진노하신 하나님은 "고기가 아직 잇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그 백성에게 큰 재앙을 내리셨다. 그 재앙이 내린 장소의 이름은 '탐욕의 무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더미>는 우리 스스로 파내려가는 '탐욕의 무덤', 그 끝을 보여준다.
아내를 웃기기 위해 토막글을 쓰다가 소설의 세계로 입문하였다는 작가는 <더미>에서도 자신의 유머 감각을 십분 발휘한다. 그 유머가 지나쳐서 어떤 대목은 다소 말장난스러운 감이 없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재밌게 읽힌다. <더미>의 섬짓한 주제와 유머 코드가 묘한 대비를 이루며, 극적 재미를 더한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면지와 도비라 사이에 만화 같은 일러스트 몇 장면을 삽입했다. 일러스트는 책의 주요한 줄거리를 압축한 것인데, 책을 읽어가며 제자리를 찾은 일러스트를 확인하는 일도 독특하고 재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