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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간 ㅣ 사계절 1318 문고 61
지크프리트 렌츠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이 남자가 "선생님" 하고 부르며 회상 속에서 선생님에게 말을 걸 때마다, 마음에 '쿵' 소리가 났어요.
"나는 사진 속의 선생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전까지 이렇게 강렬한 상실의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여태껏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63)
<침묵의 시간>은 학교 강당에서 치러지는 추모식으로 시작됩니다. 크리스티안은 슈텔라 선생님의 영어 수업을 들었던 13학년 학생입니다. 슈텔라 선생님의 영정 앞에선 크리스티안, 추모식을 지켜보는 그의 독백이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크리스티안의 비밀스러운 회상 속에서 슈텔라 선생님과 크리스티안이 함께했던 시간들이 서서히 복원됩니다. 이별 예식이 치러지는 그 자리에서 그들의 사랑 이야기가 서서히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끝나버린 자리에 서 있지만, 그들의 사랑은 사실 시작되는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함께 있으면서도 그 사람을 생각할 수 있는 게 인간이었다."(88)
<침묵의 시간>은 스승과 제자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금기가 주제는 아닙니다. 걱정스러운 시선, 나무라는 시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에 빠져드는 청춘이 있을 뿐입니다. 서로에게 반응하는 심장의 박동이 느껴지고, 사랑에 들뜬 열기가 전해집니다. 설레임과 망설임 속에 그 둘은 서로에게 다가갔고,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 사랑이 끝나 버렸습니다.
"선생님! 나는 유골 단지에서 나온 그 하얀 잿가루가 당신의 잔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잿가루는 바람에 조금 날리다가 곧 물 위로 내려앉았습니다. 바다는 재를 재빨리 받아들였고, 아무런 흔적도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소리 없는 소멸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죠. 이것이, 이별의 문법인가요?"(148)
소리 없는 소멸. 선생님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채 피워보지도 못한 그 둘의 사랑도 그렇게 소멸하고 있었습니다. 다 타버린 사랑의 재가 아니라, 채 피워보지 못한 사랑이었기에, 크리스티안의 심장에는 아직 뜨거운 사랑의 정염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설레임이 멈추고, 터질 것 같은 가슴도 진정해야 할 시간입니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저기 떠가는 꽃들이 내 젊음의 영원한 비극으로 기억되는 동시에, 상실의 아픔을 보듬는 크나큰 위안이 되리라는 것을."(148)
당시 오십을 넘긴 담임선생님이 십대 여고생이었던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몸은 나이를 먹지만 마음은 너희들이 느끼는 그 설레임을 아직도 똑같이 느끼고 있다고. 요즘 나의 바람은 몸이 나이를 먹는 것만큼, 마음도 나이를 먹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청춘의 끝자락에 선 내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것들을 단념해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청춘의 사랑을 유난히 아름답게 기억합니까. 또다시 심장을 뛰게 할 사랑은 또 온다고, 사랑은 언제고 시작될 수 있다고, 그렇게 주문을 걸다가도, 차라리 청춘만이 경험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은 다시 없다고, 이제는 놓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단념시킵니다.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은 질긴 미련으로 남아 두고두고 기억을 괴롭히겠지만, 그나마도 갖지 못한 청춘이라면 그것은 또 얼마나 가난한 인생이겠습니까.
"어쩌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침묵 속에 머물고 지켜져야 할지 모릅니다."(153)
심장이 기억하는 사랑은 데인 것처럼 쓰라립니다. 잃어버린 사랑이 기억날 때마다, 어느 순간을 밤새도록 후회하고 또 후회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나간 사랑에 미련을 두는 이유는 '그 사람 때문에 행복했던 나'를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지만, 그 순간은 영원 속에 남겨집니다. 크리스티안이 슈텔라 선생님과의 추억을 남들에게 누설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다른 사람이 공유할 수 없는 그 둘만의 비밀스러운 영역이 그 영원 속에 남았기 때문이죠. 그의 손이 선생님 몸에 닿을 때의 갑작스러운 행복과 그 느낌을 또다시 원하는 설렘으로 그는 아직 가슴이 터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 영역을 함부로 꺼내보이는 것은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선생님, (...) 그곳에서는 기억 속의 모든 것이 되풀이 될 거에요. 지나간 일이 다시 일어나고 영원히 반복될 테죠. 아픔과 두려움이 함께하겠지만,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다시 살려 내려고 애쓸 겁니다."(149)
<침묵의 시간>, 표지에 얼굴을 반쯤 내보이고 있는 젊은 남자가 있습니다. 어딘가 무심해 보이는 표정 때문일까요. 어쩐지 나는 이 사람이, 얼마 전에 끝난 '거침 없이 하이킥'이라는 시트콤의 '이지훈'이라는 캐릭터를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사랑했던 선생님의 추도식에 선 이 열아홉 살 소년은, 눈부시게 밝은 햇살 속에 홀로 서 있는 이방인처럼, 홀로 섞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소리 내어 슬퍼할 때, 그는 무척이나 담담해보입니다. 그러나 슈텔라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별 예식을 마친 사람들은 기억의 끈을 놓으며 슬픔에서 놓여나려 하는데, 그는 홀로 사랑의 기억을 지고 가고 있습니다. 덤덤하게 읽어내려가다 그가 '선생님' 하고 부르는 대목을 만날 때면, 어디선가 날아든 공에 가슴을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뻐끈한 통증이 갈수록 번져나갔어요.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다시 살려 내려고 애쓸 것이라"는, 이 청춘을 어찌해야 하나, 괜히 제 가슴이 아파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