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연
필립 그랭베르 지음, 홍은주 옮김 / 다른세상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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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랑(우정)을 가장한 악연의 덫, 아름다울수록, 간절할수록 더 치명적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똑같은 중량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어쩌면 이런 바람을 갖고 있는 것부터가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는 소리지.

그러나 우리가 사랑을 할 때, 사랑을 하면서도, 상처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얼마 전, 요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그룹 ’2PM’의 일부 팬들이 안티로 돌아서면서, "팬이 안티가 되면 더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선언한 적이 있다. 그들은 왜 한때 격하게 아꼈던 대상에게 분노를 쏟아놓고, 과격한 공격도 서슴지 않는가. 통속적이지만, 사랑이 큰 만큼 배신감도 컸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배신이라고 하는가? 내 사랑에 대한 거절? 시간이 흐를수록 가벼워지는 사랑의 중량? 

중학교 시절, 자꾸만 나의 우정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친구가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과 짝이 되면 조용히 그 짝을 협박해(!) 자리를 바꾸었고, 무엇을 하든 함께 하려 하고, 어디를 가든 함께 가려 했다. 그 친구가 가장 견디기 힘들어 했던 것은 내가 다른 친구들과도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날, 청소시간이었다. 그 친구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물었다. "너, 정말 나를 좋아해?" "응, 좋아해!" 그러자 친구는 마룻바닥에 칠하는 왁스를 내밀며 내게 말했다. "정말 좋아하면 이 왁스를 먹어봐!" 그 이후로 그 친구를 피했던 것 같다. 그 아이가 무서웠다. 나의 마음을 눈치 챈 친구도 생각보다 쉽게 돌아섰다. 길에서 마주쳐도 눈인사조차 하지 않는 차가운 사이가 되었다. 모르는 사람보다도 못한 그런 사이가, 차라리 좋아하지 않았던 것만도 못한 그런 사이가. 

<악연>에서 내가 읽은 것은 서로 중량이 다른 사랑(우정)이었다. 한 사람의 사랑이 시들해질수록, 상대의 사랑은 집착으로 변질되는 사랑. 루는 어린 시절 공원에서 처음 만난 만도와 단짝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무엇이든 ’함께’하며, 죽어서도(!) 변치 않을 우정을 약속했다. 

"같이 놀고, 같은 책을 읽고, 첫 경험도 같이 치르면서 숱한 것을 나눴던 우리였지만 나날이 독재처럼 변모하는 우정에서 나는 벗어나고 싶었다. (...) 닌느에게도 가비에게도 유일한 존재였고, 그녀들 가슴속의 내 자리를 유지하고자 나름으로 분투했던 내가 이제 만도에게 유일한 존재란 사실은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이다"(119).

루는 점점 만도의 우정을 버거워한다. 만도는 여자 친구가 루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여자 친구와 헤어진다. 루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루가 자유롭기를 원할수록, 만도는 더욱 견고히 결속되기를 원한다. 결국, 그들의 우정은 루와 만도 모두에게 재앙이 되고 만다.

<악연>의 작가 필립 그랭베르는 소설가이자 정신분석가라고 한다. "인간의 내밀한 심리를 끄집어내는 데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특히 병적인 심리를 그려내는 데 탁월한 듯 하다. 작가는 책에 등장하는 정신분석학 교수의 입을 빌어 "정신질환자는 정신병에 ’걸리는’ 게 아니라 ’애초부터’ 정신질환자이다"(151)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증상은 ’악연’이라고 부르는 것의 결과로 나타날 때가 많다고 한다. 예를 들면, 실연이나 절교가 계기가 되어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교수는 악연을 이렇게 정의한다. 

"등 없는 작은 의자가 전부 다리 네 개로 서 있는 건 아니다. 그중엔 다리 세 개로 버티는 것들도 있다. 거기서 다리 하나가 더 없어지면 치명타가 된다"(152).

이 강의를 듣고, 루는 생각한다. "우리가 둘도 없는 친구였던 시간 동안 나는 만도에게 무엇이었나?" 그는 자신이 만도의 광기를 가로막고 있었던 그 무엇이라고 느낀다. 결국, 루와의 절교로 "만도의 고집, 찌꺼기 하나 없이 깨끗한 우정을 간직하려는 강박 관념이 비로소 전모를 드러낸다"(152-153). 바로 악연의 작동으로 말이다.

작가는 만도의 집착에 가까운 사랑이 ’애초부터’ 만도 안에 잠재되어 있던 광기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악연'은 계기이지, 원인이 아니다. 건강한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애초부터' 병들어 있던 마음 때문이지, 악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작가가 <악연>을 통해 그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단서는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둘을 갈라놓은 건 다른 것, 처음부터 도사리고 있던 어떤 것이었지만 그때는 누구도 그걸 짐작할 수 없었다"(11). 

<악연>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중심은 만도의 일기장에서 깨끗이 지워진 ’한 사건’이다. 그 사건이 진실을 드러냈을 때, 만도가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알게 되었을 때, 아름다운 우정 뒤에 숨어 있는 검은 광기가 우리를 오싹하게 만든다. 

"내가 그 애의 악연이었나, 그 애가 나의 악연이었나?"(205)

악연은 사랑을 걷어내고, 사랑에 달라붙어 있던 어두운 그림자를 불러온다. ’악연’은 사랑했던 사람 모두를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로 만드는 것 같다. 치명타를 입고 상처받은 쪽도 그렇지만, 치명타를 입힌 쪽도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악연’이지 않을까.

<악연>은 기대했던 것만큼 스토리가 재미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면, 장면의 강렬함이 독특한, 상당히 인상적인 작품이다. 두 번쯤 읽으니 책이 무엇을 말하는지 조금 보이는 듯하다. 대수롭지 않던 것들의 실체를 마주했을 때, 사랑(우정)이라 믿었던 인연이 재앙으로 변하는 순간, <악연>이라는 제목이 오싹하게 다가올 것이다. 사랑(우정)을 가장한 악연의 덫, 아름다울수록, 간절할수록 더 치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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