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 (양장)
레베카 크누스 지음, 강창래 옮김 / 알마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책의 학살이 일어나는 메커니즘


"사실 책을 파괴하는 것은 그런 두려움을 표현하는, 즉 책의 힘을 찬양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11).

이 책은 내게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연상시킨다. 살인사건과 종교와 도서관과 권력의 비밀을 둘러싼 미스테리말이다. ’libricide’라는 단어(말)가 존재할 정도로 책의 학살은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요, ’전통’으로 인류 사회에 존재한다. 역사는 책을 학살했던 사건들이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임을 말해준다. 인간 역사에서 특정한 사상을 배격하여 책을 불태우는 책의 학살 사건은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고, 지금도 자행되고 있다. 인간과 같은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동물은 없다고 하는데, 왜 인간은 마치 자살을 하듯 자신의 문화를 스스로 파괴하는 것일까?

이 책은 책의 학살 역사와 현상을 고찰하며, 20세기 사례를 분석한 ’논문’으로 읽힌다. 이 책에서 사용되는 ’책의 학살’이라는 용어는 특히 20세기에 대규모로 저질러진, 정부가 승인한 책과 도서관 파괴를 가리키고 있다. 저자가 특별히 20세기를 구분하여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의 논제를 요약하면 이렇다. 20세기 이후에 벌어진 책의 학살은 종교를 대신한 국가에 의해 합법성과 사회적인 정당성을 부여받으며 책의 학살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대규모 학살 사건, 즉 독일, 세르비아, 이라크, 중국, 티베트에서 벌어진 다섯 가지 학살 사건을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논증을 펼친다. "책의 학살은 인종말살과 문화말살이라는 틀 안에서 일어난 종속적인 현상 또는 부차적인 형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31). 정부나 체제에 의해 주도되는 책의 학살 사건은 인종말살과 문화말살을 일으키는 동일한 메커니즘에 의해 벌어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책의 학살이 일어나는 원인과 이유를 책이 가진 ’정치성’에서 찾고 있다. 체제를 강화하는 통치 방편이 될 수도 있고, 또 체제를 전복시키는 위협적인 힘이 될 수도 있는 책의 정치적인 속성이 ’무기’로 또는 ’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데올리기 시대라고 할 수 있는 20세기의 극단적인 정치권력은 자신들과 이념이 다르거나 그 이념을 방해하는 사상을 없애려 했다. 그 방법이 바로 ’책의 학살’이었던 것이다.

"정권이 권력을 강화하면서 이념은 전체주의를 위한 이론적 근거가 된다. 이념의 정통성은 필요하다면 폭력을 써서라도 모든 이견과의 차이를 몰아내고 순응할 것을 요구한다. 책과 도서관은 기억을 보존하고 증거를 제공하며 다양한 관점이 유효하다는 증거를 보관하고 지적인 자유를 누리게 해주면서 집단의 정체성을 지원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통제되고 검열되며 광범위하게 숙청되기까지 한다. 만일 변혁을 방해하거나 이념의 목표를 더 이상 이루지도, 이룰 수도 없게 만들 집단으로 판단되는 적과 텍스트가 너무나 밀접하다면 그것들은 배신자 집단과 함께 공격을 받는다. 사람의 목소리를 없애려 할 때 그 목소리를 물질적으로 표현한 텍스트도 함께 파괴된다. 짧게 줄이면 이것이 책의 학살의 역학 구조다"(156).

이 책은 ’책의 학살’을 예방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로 나아간다. 제도와 합법성 하에서 자행되는 책의 학살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막을 제도와 합법성을 보완하고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이 분석한 사례는 모두 외국의 것이지만, 우리에게도 책의 학살은 낯설지 않은 경험이다. 그런데 책의 정치적 속성과 정치 권력의 대응과 반응을 읽으며, 현 정치권의 방송장악 논란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20세기에 자행된 책의 학살 사건보다 우리의 방송장악 논란이 더욱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의 싸움은 더 이상 신념(이념)이나 높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원시로 퇴보하는 느낌마저 든다. 

이 책은 한 편의 논문처럼 책의 학살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 틀과 사례 분석이 논리적이다. 이떤 주제에 대한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이해와 통찰을 원할 때 가장 먼저 ’논문’을 찾아보는 습관을 가진 내게는 더 없이 만족스러운 책이다. 또 하나 이 책의 또다른 장점은 500페이지가 넘는 책인데, 가볍다는 것이다! 주제와 내용, 그리고 부피의 무거움에 비해 실제 무게는 상당히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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