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무 생각 없이 태평하게 살던 시절에도 누군가에게 소중했던 사람들이 날마다 죽어갔구나(549).
오늘은 또 몇 명의 사람들이 죽음으로 생(生)을 마감할까.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생명이 나고 죽으며, 그렇게 삶과 죽음이 교차하고 있으리라.
내 기억 속의 첫 장례식은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이다. 오랫동안 병상에 계시다 돌아가신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은 쓸쓸하기 그지 없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머물렀던 시간이 길어서 그런지 깊은 슬픔을 토해내는 가족도 없고,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조문객도 없었다. 회사도 퇴직한지 오래여서 몇몇의 친인척말고는 찾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 처음 가본 화장터에서 나는 담담한 친구를 대신하기라도 하려는 듯, 울고 또 울었다.
잠시 진정하고 주변을 보니, 여기저기 다른 가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젊은 청년의 영정을 들고 오열하는 어머니, 어머니를 보내드리며 애통해 하는 딸들, 누구를 보냈는지 손수건으로 주름진 눈가를 조용히 훔치고 있는 노신사. 화장터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계속 울고 있는 나를 보고, 한 친구가 이렇게 놀렸었다. "영화 보니?"
너희는 무슨 기준으로 어떤 고인은 동정하고, 어떤 고인은 내팽개치는 거냐......?(213)
난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때' 돌아가신 할머니께 감사드렸다. 아흔두 해를 사시고 돌아가 나의 할머니. 할머니의 장례식장에는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하고, 할머니를 추억하는 조문객보다 인사를 위해 들린 '누구와 어떻게 아는 사이'인 사람들로 가득찼고, 경쟁적으로 들어서는 조화는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고 있었다. 장례식장이야말로 빈부와 계층의 격차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곳이었다. 아버지 사업이 부도났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면 어쩔뻔 했는가.
나는 돌아가신 분을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로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것을 '애도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65).
<애도하는 사람>은 죽은 이를 찾아다니며는 한 청년의 이야기이다. 그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전국을 떠돌아다닌다. 그를 중심으로 그와 관계가 있는 세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며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야기를 꾸려나간다.
<애도하는 사람>은 말한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태평하게 살아가는 시간에도 누군가에게 소중했던 사람들이 날마다 죽어가고 있다고. 어떤 고인은 슬픔과 사랑 속에 이 땅을 떠나지만, 내팽개쳐지는 죽음도 있다고. 그러나 결국에는 모두 잊혀질 뿐이라고.
<애도하는 사람>이 제기하는 문제는 이것이다. 주목받지 못한 죽음, 아무도 돌이켜 생각하지 않는 죽음이 있다는 '현실'과, 죽음의 무게는 다르지 않는데 어째서! 하는 '슬픔'이 그것이다(476).
저자는 ’애도하는 사람’이 태어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당신을 ’애도하는 사람’으로 만든 것은 이 세상에 넘쳐나는 죽은 이를 잊어가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차별당하거나 잊혀가는 것에 대한 분노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도 별 볼일 없는 사망자로 취급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세상에 만연한 이런 부담감이 쌓여서, 그리고 그것이 차고 넘쳐서 어떤 이를, 즉 당신을 '애도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431-432).
그리고 세상 어딘가에 또다른 '애도하는 사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도 어떤 이유로 죽었건 차별하지 않고, 사랑과 감사에 관한 추억에 따라 가슴에 새기고, 그 인물이 살아 있었음을 오래도록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이 태어났을지도 모른다"(432).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로 네 가슴에 담으려 하는구나......(286).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는 '죽음에도 차별이 존재한다. <애도하는 사람>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 죽음의 차별을 슬퍼한다. 그가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죽음도 존재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존재에 대한 존중이요, 생명에 대한 경외심인 것이다. 어떤 삶을 살았건, 어떠한 죽음을 맞았건, 이 세상에 살았던 유일한 존재'에 대한 예우이다.
<애도하는 사람>을 읽으며 죽음의 경계를 어슬렁거리고 나서, 나는 며칠을 앓았다. 생과 죽음의 에너지가 팽팽하게 들어찬 우주 안에서, 바로 그 생과 죽음의 사슬에 묶여 있는 기분이었다. "넓은 하늘 아래서 웃고, 대지 위에서 운, 새끼 직박구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시즈토처럼, 머릿속으로 내가 기억하는 수많은 삶과 죽음이 정신없이 교차했다. 그러면서 내가 느낀 감정은 질식할 것 같은 인생의 허무도 아니고, 나에게도 닥쳐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고, 흔적도 없이 잊혀질 것에 대한 분노도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죽음)에 대한 슬픔이면서 동시에 존재(죽음)에 대한 경건한 마음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야 해(257).
삶과 죽음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이모는 평생을 친구처럼 의지했던 이모부를 떠나보내고도 살아가고, 내 동생은 온 마음으로 사랑했던 강아지를 잃고도 살아가고, 내 친구는 십대 시절 한꺼번에 부모님을 잃고도 살아가고, 우리는 모두 그렇게 끊임없이 누군가를 떠나보내면서 살아간다. 장례식장에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온 가족이 평온하게 둘러앉아 식사할 수 있는 그 순간이 바로 기적이라는 것을 실감하며 말이다.
인생의 본질은 어떻게 죽었나가 아니라, 사는 동안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사랑받고 어떤 일로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았는가에 있는 게 아닐까(551).
인생 별거 없다고 느낄 때마다, 죽음이 나의 현실로 느껴질 때마다, 누군가를 떠나보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오늘 단 하루만 산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하나님이 내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항상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저 사랑하며 사는 일이 아닐까'라고. 누구의 죽음도 차별하지 않는 '애도하는 사람'과 같이 누구의 존재도 차별하지 않으며 말이다.
’애도하는 사람’은 어떤 인물이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세 가지 요건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누구를 사랑했는가? 누구에게 사랑받았는가? 누군가가 어떤 일로 그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는가?"(265). 이것은 '사랑하며, 사랑 받으며, 감사하며' 살자는 작가의 초대이리라.
언제가 나를 보내줄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나의 장례식장에 와준 사람들 모두가 "내가 누구를 사랑했고, 누구에게 사랑을 받았고, 누군가가 어떤 일로 나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는지"를 함께 추억하며, 그렇게 애도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나를 영원히 기억하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그 장례식장에서만큼은 나를 '유일한 존재'로 가슴에 담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모두의 기억 속에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 남기고 가는 인생이고 싶다. 그때를 위해 오늘도 나는 열심히 사랑해야겠다.